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형사사건의 유무죄 판단에서
엄격한 태도가 일관되어 있다면
그런 판단을 수긍하기가
보다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못한 법현실이 딱하다

영국의 형사법정에서는 ‘피고인은 무고(無辜, innocent)하다’라고 변론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피고인은 유죄가 아니다(not guilty)’라고 변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전자와 같이 변론을 하면 판사나 배심이 유죄의 증거가 있는지를 살피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결백하다는 증거가 있는지를 살피는 쪽으로 경도될 수 있는데, 형사사법의 대원칙인 무죄추정 원칙에 어긋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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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의 풀이로 무죄 판결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지 못한 경우’다. 여기에서 ‘합리적 의심’은 유죄일 것 같다는 심증을 흔들 수 있을 만한 다른 사정의 존재, 즉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을 말한다.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경계가 정량적 엄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증거와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또 사건을 보는 태도에 ‘두려움도 호의도 없다’는 것, 즉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씨에 대한 형사사건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 사건의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A, B, C 3인과 공모하여 의사 등이 아니면서 형식상 비영리의료법인을 설립한 양 꾸민 후 영리 목적의 의료기관을 개설하였다’는 것과 ‘그렇게 개설된 의료기관을 운영하면서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요양급여비용을 지급받았으니 이는 사기행위다’라는 것이다.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의 결론을 내렸다. 두 법원의 판단은 우선 법률 해석에서 달랐다. 1심은 의료인이 아니면서 시설을 갖추고 의료인을 고용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한 행위는 실질적으로는 비의료인이 의료기관을 개설한 것이라서 의료법에 위반되며, 이 법리는 비영리법인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한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2심은 비의료인도 의료법인의 개설과 운영에 참여할 수 있고, 비의료인이 이렇게 의료법인을 설립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하는 행위는 그것이 ‘형식적으로만 적법한 의료기관 개설을 가장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그 의료기관이 비의료인의 개인기업에 불과하거나 의료법 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함부로 이용되는 경우’에만 의료법 위반이 된다고 보았다. 기존 대법원 판례와 달리 보았거나 그 적용범위를 좁게 해석한 것이다.

1심이 유죄의 근거로 인정한 주요 사실은 대략 이렇다. 피고인이 제3자로부터 병원 건물을 매수하여 계약금을 지급하고 의료법인의 설립 허가에 관여하여 이사장이 된 사실과, 병원 개설 후 매매계약의 이행, 설립 허가 취소를 막기 위한 이사회 참여, 병원 건물에 대한 공매를 막기 위한 피고인 소유 부동산의 담보 제공, 병원 장비의 구입 관여와 일부 운영자금 제공, 피고인 사위의 병원 행정원장 근무,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은 요양급여비용으로 피고인의 병원에 대한 대여금 변제 수령, 책임면제각서의 수령 등 사실이다. 반면에 2심은 위의 엄격해석론을 바탕으로 1심이 인정한 사실을 달리 해석하거나 별개 사실을 보충 인정했다. 즉 의료법인의 설립은 가장된 것이 아니고, 이사장이 된 것은 투자금 회수의 담보 목적이었고, 설립 후의 여러 행위로 법인의 재정이나 병원의 시설·인력·자금이 허위로 확보되거나 부실화된 것도 아니고, 피고인의 사위가 실제로 병원 운영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거나 집행한 바 없고, 변제받은 돈의 액수는 투자금보다 적으며 병원 수익의 분배약정도 없었고, 책임면제각서는 피고인이 법인 탈퇴 후 A의 사기 행각을 보고 자신이 책임을 질까 염려되어 징구한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A 등이 이미 의료법 위반과 사기 피고사건에서 유죄로 확정되었더라도, 피고인이 이들과 공모했다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세간의 정치적 해석은 빼자. 어느 판결이 옳을까. 우선 의료법 해석론이 사실 인정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는지에 관한 판단의 전제가 되어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2심의 해석론이 기존 판례와 달라 보이는데도 대법원이 2심 판결을 유지하면서 이에 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던 점은 유감스럽다. 그럼 2심의 의료법 해석론이 옳다고 할 때, 합리적 의심의 여지는 있었던 것일까. 유죄와 무죄 사이에 거리 같은 건 없다. 그냥 경계선이 있을 뿐이다. 한 발 차이다. 오늘날 모든 형사사건의 유무죄 판단에서 2심과 같은 엄격한 태도가 일관되어 있다면, 2심 판단을 수긍하기가 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법현실이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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