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피곤하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물가안정은 역대 정부가 공히 역점을 쏟은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1970~1990년대 경제 부처는 물론 관공서를 총동원해 물가잡기에 나서곤 했다. 일선 공무원을 중심으로 단속반을 구성하고 음식점·서비스업소를 직접 찾아가 일제단속을 했다. 가격이나 요금을 과다하게 올리면 행정지도를 하고 이에 불응하면 위생검사와 세무조사에 들어가는 등 제재를 가했다.

조홍민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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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짜장면, 설렁탕, 비빔밥 등 음식값은 물론 심지어 다방 커피값까지 물가단속의 타깃이 됐다. 이·미용료, 목욕료, 세탁료, 자동차학원 수강료까지 실생활과 관련 있는 대상은 거의 망라했다. 1976년엔 경제기획원 산하에 ‘물가안정위원회’를 설치해 특정 분야의 물가를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공공요금을 결정하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물가가 지난해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이젠 민생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 난방비와 공공요금이 뜀박질하고 식당 메뉴판과 마트 가격표의 맨 앞자리 숫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이 5000원에 육박하고 칼국수 한 그릇에 1만원을 넘게 받는 곳이 생겨난 지도 오래다. 서민의 술인 소주 가격도 6000원을 찍을 판이다. 시기만 늦췄을 뿐 버스·지하철 요금도 조만간 오를 예정이다. 치솟는 물가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1%. 1998년 외환위기 당시 7.5% 이후 2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가 상승의 이면에는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공급망 교란과 원자재 가격 상승, 미국의 금리 인상과 환율 급등,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소비 증가 등 다양한 원인들이 얽혀 있다. 우리뿐 아니다. 치솟는 물가에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내놓는 물가안정을 위한 해법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7차례 물가안정 대책이 발표됐는데도 체감물가는 여전히 고공비행 중이다. 치솟는 물가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요인을 분석하고 체계적인 대응을 해야 하지만 주먹구구 대책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난방비 폭탄을 맞게 된 것은 공공요금을 제때 올리지 않은 전 정부 탓이라는 비난으로 퉁친다. 대안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전 정권의 실책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식이다. 기업 물가 인상 요인을 관리하지 못한 현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데도 말이다.

정책의 일관성도 실종됐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부르짖다가, 아니다 싶었는지 기업들을 상대로 통제를 가한다. ‘간담회’에선 물가안정을 위한 업계의 협력을 당부하지만 기업으로선 ‘가격을 올리지 말라’는 압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정부의 요청에 누가 용기 있게 “못하겠다”며 반발할 수 있을까. ‘통신사도 고통분담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3사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3월 한 달간 대량의 데이터를 무상 제공하겠다고 발표한 것만 봐도 쉽게 짐작이 간다. 몇달 전까지 기업의 투자 독려를 위해 규제 철폐를 외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고용불안마저 겹치고 있다. 지난달 실업자 수는 102만4000명으로 지난해 1월(114만3000명) 이후 1년 만에 다시 100만명을 넘어섰다. 통계청에 따르면 실업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더한 경제고통지수가 8.8로 집계돼 역대 1월 기준 최고를 기록했다. 종전 최고인 2010년 1월 기록(8.5)을 뛰어넘었다. 일자리 구하기도 힘든데 물가까지 덩달아 뛰면서 서민의 어깨를 짓누른다. 민생고는 더해가지만 해결할 만한 묘책은 윤곽조차 잡히지 않는다. 정부가 기껏 마련한 ‘××전략회의, ○○대책회의’에선 거창한 수치와 장밋빛 청사진이 나오지만 실제 목표를 이룰지는 미지수다. 민생과는 거리가 먼 뉴스들만 난무한다. 재정 투명성을 빌미 삼아 노조 때리기가 연일 지속되고 툭하면 야당 대표 등을 겨냥한 압수수색이 벌어진다.

<사기>의 ‘유림열전’을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힘써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爲治者不在多言 顧力行何如耳)”는 구절이 나온다. 한 무제가 신공(申公)이란 학자에게 치세의 근본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다고, 또는 반대편에 섰다고 말과 권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몰아붙이기에 앞서 민생을 위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가뜩이나 괴로운데 더 힘들게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팍팍한 삶에 지칠 대로 지쳤다. 국민들은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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