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과 선택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 25위의 1인당 국내총생산과 52위의 행복지수, 최저 수준의 출생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의 자살률, 노인빈곤율 2위, 연평균 노동시간 4위, 성별 임금격차 1위, 일하는 여성의 ‘유리천장지수’ 꼴찌. 세계 최고의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비율, 연 27조원에 달하는 초중고 사교육비, OECD 평균을 밑도는 조세부담률과 최저 수준의 사회보호지출.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저출생에 따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잠재성장률 하락의 원인이고,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로 고용불안과 숙련-비숙련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확대되고 있다. 세계적 차원의 기후 변화 대응과 글로벌 공급망의 블록화 경향이 에너지 다소비 제조업의 비중 높은 한국경제에 작지 않은 타격을 줄 것이다. 물가상승과 생산성 증가율을 밑도는 임금상승률, 불안정한 주택시장과 부족한 공공임대주택, 과도한 가계부채,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로 민생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 2월14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발표한 ‘4·10 총선 유권자 10대 의제’는 우리 사회의 실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민생안정, 저출생 대책, 사회적 갈등 완화,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 사회안전망 구축, 균형발전 및 지역소멸 대처, 청년실업 대책,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제도, 탄소 중립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대응책, 저성장 극복 대책의 순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발표한 10대 공약도 대체로 이러한 유권자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표심을 얻으려는 각 당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민생안정과 저출생 대책을 최우선 공약으로 하면서 기후위기 대처, 혁신성장과 균형발전, 국민의 안전과 행복한 삶, 소상공인·자영업자·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이어 한반도 평화체제의 유지, 민주주의 회복과 정치개혁을 10대 공약에 포함했다. 국민의힘도 저출생 대책과 민생보호를 강조하면서 중소기업 지원, 시민 안전, 지역발전, 교통·주거격차 해소, 청년 지원, 어르신 지원, 기후위기 대응을 10대 공약으로 선정했다.

양당의 공약이 외형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우선순위와 추진과제는 정당의 정책기조로 인해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은 포용성장의 정책기조하에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혁신적 지원체계를 강화하는 재정지원사업 위주로 추진과제를 구성하였다.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으로의 전환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민주적 정치체제와 평화체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약에 담아냈다. 반면에 국민의힘은 ‘선성장 후분배’와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과 질서는 세운다)의 정책기조를 기반으로 자산형성지원과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저출생 대책과 지역 간 교통망 구축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규제 대못 뽑기 차원에서 신산업 분야에 대한 규제제로박스의 신설과 지역 토지규제의 전면 재검토를 공약 이행 사업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회복세가 더디고, 가계부채가 급속히 증가하는 상황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취약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 민생을 회복하고 내수기반을 확장하는 데 두어야 한다. 최후의 대부자로서뿐만 아니라 최후의 고용자로서 정부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

나아가 공약 이행에 필요한 막대한 규모의 재원 마련 방안도 보완되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주로 기금,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개발이익환수금, 정부재정 지출구조 조정, 총수입 증가분에 의존하고 있으며, 세수확충 방안은 찾아볼 수 없다. 재정지출 가운데 의무지출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지출구조조정의 여지는 줄어들고, 성장률 전망치의 하향조정으로 총수입 증가분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따라서 취약한 조세체계의 재분배기능을 강화하는 누진적인 방식으로 세수를 확충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여당의 조세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고액자산가도 혜택을 보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과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폐지, 가업상속공제 제도 적용 대상 확대 등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한국경제는 복합위기에 직면하여 전환기의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놓여 있다. 그래서 앞으로의 4년이 특히 중요하다. 투표는 공약에 조세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달리 불특정 다수와 미래세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22대 국회가 대전환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세심히 살펴서 선택해야 한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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