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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길목에서 ‘페미니즘’이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정치권에 소환되고 있다. 야권 대선 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내용의 ‘쥴리 벽화’와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숏컷’에 덧씌워진 남혐·여혐 논란, 저출생 원인을 남녀 교제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건강한 페미니즘’이라는 구분을 지은 윤 전 총장에 이르기까지 정치권에서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부추기는 차원으로 재생산됐다.

이해득실에 따라 젠더 갈등에 편승하고 혐오를 ‘방관’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심화된 불평등·양극화 해소가 주요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상황에서 페미니즘이 특정 집단의 분노를 자극해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려는 적대적 언어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풀어가는 미래 의제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티페미니즘'에 탑승한 여야 정치권



서울 종로구에 등장한 ‘쥴리의 남자들’ 벽화는 대선 국면에서 여성 혐오 문제를 촉발시켰다. 여권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윤 전 총장 부인 김씨를 두고 제기한 ‘유흥업소 종사 의혹’은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채 대선 후보 검증이라는 명분으로 무분별한 사생활 들추기라는 지적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쥴리 벽화’에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다가 논란이 커지자 하루 늦게 “인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서울 종로구 홍길동 중고서점 벽면에 그려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씨와 관련된 내용의 벽화를 7월 29일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차량으로 가리고 있다. 이석우 기자

서울 종로구 홍길동 중고서점 벽면에 그려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씨와 관련된 내용의 벽화를 7월 29일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차량으로 가리고 있다. 이석우 기자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선수의 짧은 머리를 페미니즘과 연관시킨 사이버폭력은 정치권을 통해 ‘여성혐오 옹호’ 논란으로 재생산됐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논란의 시작은 허구였으나, 이후 안 선수가 남혐(남성 혐오) 단어로 지목된 용어들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서 실재하는 갈등으로 변했다”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었다. 책임을 안 선수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양 대변인을 옹호하며 정치적 공방으로 비화됐다.

윤 전 총장의 페미니즘 발언은 대선 후보가 직접 논란을 자초한 경우다. 윤 전 총장은 지난 2일 저출생 문제를 두고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남녀간 건전한 교제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도 건강한 페미니즘이어야지 페미니즘을 선거에 유리하게 하고 집권연장에 유리하게 해선 안된다”고도 했다. 페미니즘과 저출생을 연결했다는 자체가 낮은 수준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젠더 갈등에 편승한 발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6월 “여성이라고 꽃처럼 대접받기 원한다면 항상 여자는 장식일 수밖에 없다. 페미라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가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가 아니다. 대한민국 모든 여성의 삶이 곧 페미니즘이고, 모든 성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비판한 일도 있다.

왜 차별과 혐오가 ‘페미니즘 논란’이 됐나



최근 잇따른 논란 속에서 페미니즘이 혐오와 차별, 배제의 언어로 다뤄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성별뿐 아니라 계급, 장애 등에 따른 차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을 페미니즘으로 본다면, 최근 논쟁은 한국 사회의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왜곡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서 혐오와 차별로 페미니즘을 소비하는 까닭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용이하다는 판단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권 대표는 “한국 정치는 특정 집단의 지지를 얻어야만 지도자급으로 부상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6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예비후보자 등록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6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예비후보자 등록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페미니즘 논란’으로 표를 얻을 수 있는 특정 계층은 주로 20대 남성(이남자)이다. 20대 여성(이여자)을 대립각으로 세우며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이남자 일각의 ‘역차별’ 정서를 자극하는 방식이 활용된다. 가깝게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 요인 중 하나로 설명되기도 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이남자 표를 얻어보려는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고 최근 상황을 진단했다.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저출생 문제가 단일 변수로 설명할 수 없는 총체적인 문제임은 최소 20년 이상의 공론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에 이르렀다”며 “단순히 페미니즘 문제로 재단해버린 윤 전 총장 발언은 한국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력의 부재를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정치권 문화가 배경에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안소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정치권이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정리해가야 하는데 오히려 편승하거나 옹호하고 있다”며 “이는 여성 유권자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부장적인 ‘형님 문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치권이 페미니즘 이슈를 차별과 혐오로 퇴행시키고 있다.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를 사상검증까지 몰고 간 남초 커뮤니티의 공세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 김건희씨를 상대로 한 인권 침해라고 비판받고 있는 ‘쥴리 벽화’ 사태에 대해 여야가 진영 논리에 기대 정치적 유불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이 페미니즘 이슈를 차별과 혐오로 퇴행시키고 있다.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를 사상검증까지 몰고 간 남초 커뮤니티의 공세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 김건희씨를 상대로 한 인권 침해라고 비판받고 있는 ‘쥴리 벽화’ 사태에 대해 여야가 진영 논리에 기대 정치적 유불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야 모두에 패싱당했다” 길잃은 여성 표심



여성들은 여야 모두를 향해 “패싱당했다”고 분노하는 목소리가 컸다. 스타트업 회사에 근무하는 이모씨(35)는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의 발언을 두고 “(사태 원인을 안산 선수 탓으로 돌리면서) 결국 여성혐오에 동조한 것이다. 이런 발언을 제1야당이 했다는 것 자체가 여혐 발언을 한 남성들에게 얼마나 힘이 되겠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국민의힘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20대 남성들의 표를 얻으려고 2030 여성 유권자를 패싱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다”며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국민의힘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 논란을 보면서) 마음이 돌아섰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성폭력 사건, ‘쥴리 벽화’ 사태에 대해서도 “무릎 꿇고 석고대죄할 일”이라며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 유권자들을 대변하는 대선 주자가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다.

회사원 오모씨(30)도 “2030 여성이 (대선 주자들에게 중요한) 유권자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게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특히 “착한 페미니즘, 나쁜 페미니즘이 따로 있느냐”면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취업 준비하면서 차별을 당해봤겠나, 경력단절 경험이 있겠나. 이런 현실을 알고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취업준비생 이모씨(27·여)도 “평소 젠더 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다가 선거철만 되면 특정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한다고 생각해서 불쾌하다”고 했다.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권의 행태에 일부 남성들도 반감을 표한다. 대학원생 송모씨(27·남)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생각이 젊고 유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페미니즘에 대해 강력하게 남자 편을 들며 너무 이분법적으로 가서 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이 제대로 된 정치의제가 되려면



페미니즘 이슈가 대선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난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통해 표심의 흐름을 예측해보려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 소속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비위로 발생한 선거에서 민주당은 피해자 사과 등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그 결과 서울 20대 여성의 15.1%가 거대 양당이 아닌 제3후보를 선택한 것으로 출구조사에서 확인됐다. 전체 집단 중 제3후보 선택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그래픽 | 이아름 기자

‘쥴리 벽화’ 논란에서 민주당의 한발 늦은 비판 목소리, 국민의힘에서 나온 안산 선수 ‘여성 혐오 옹호’ 논란과 윤 전 총장의 페미니즘 발언 여파까지 고려한다면 20대 여성의 표심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할 가능성이 높다. ‘어게인 4·7 보궐선거 표심’인 셈이다.

다만 페미니즘의 영향을 가늠하기에 이른 시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서 대표는 “아직 대선 후보들이 구체적 정보를 내놓지 않아 유권자들의 판단이 형성되지 않았다”며 “보궐선거와 대선은 전개 양상이 다르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선 후보들을 비롯해 정치권이 대선 국면에서 페미니즘을 다루는 방식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페미니즘이 성평등을 지향하는 가치라는 점에서 남녀 이분법의 갈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코로나19 이후 돌봄·노동·성장 등 사회 구조 전반의 변화를 다루는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저성장과 인구 감소 등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지속 가능할지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남녀가 가족과 시장과 사회 안에서 공존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han.kr
유설희 기자 sorr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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