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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플랫 입주자 프로젝트로 시작한 ‘엄마 성 빛내기’ 신청자는 최종 137명으로 집계됐다.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는 엄마 성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성평등을 근거로 성·본 변경 청구서를 작성하고 전국 법원에 청구를 하는 프로젝트다. 프로젝트 기획자인 김준영 그림책 작가는 “엄마 성을 쓰는 것이 별나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신청자 중 100여명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전국 법원에 성·본 변경 청구서를 제출하겠다고 의향을 밝혔다. 가족 설득이 더 필요해 다음 번으로 성·본변경 청구를 미룬 경우도 있다.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면서 신청자들이 ‘조력팀’이 되어 힘을 보탰다. 자료집 편집, 굿즈 제작, 세미나 준비 등을 편집팀·홍보팀·굿즈·정보팀으로 일을 나눠 맡고 있다. 조력팀원 중 전화 인터뷰에 응한 4명의 신청 사연을 정리했다.

📌[플랫 입주자 프로젝트]엄마가 말했다 “엄마부터 엄마 성으로 바꿔볼게”

김유원 “‘부성’ 기본값에 ‘작은 금’이라도”

김유원씨(36·가명)는 스물일곱에 결혼했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던 날 ‘모의 성’을 쓸 수 있다는 항목에 남편은 ‘아니오’라고 체크했고 유원씨는 찜찜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이제 남편과 이혼한 상태다.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를 김선경·준영 모녀의 영상 인터뷰를 통해 접했다. “딸은 틀리지 않았지만 공격에 직면할 수 있을텐데 딸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엄마고,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고 생각했어요.” 선경씨의 말에 유원씨는 ‘눈물 버튼’이 눌렸다.

왜 아빠 성만 써야 해?

부모님은 유원씨가 스무살이 됐을 때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이혼했다. 유원씨가 보기에 엄마는 ‘가모장’이었다. 청소년기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져 유원씨에게는 아버지가 부재했고 엄마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해 많이 이해할 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결핍’은 있다. 엄마가 혼자 일하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엄마의 뒷바라지에 대해 생각한다. 엄마가 아버지와 유원씨 남매에게 ‘김씨들’이라고 할 때 ‘엄마는 엄마 성을 따르는 자식이 없네’라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이 엄마 성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프로젝트를 접하고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김씨가 된 거니 남은 인생은 온전히 내 의지로 엄마 성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엄마 성으로 바꾸면 ‘정유원’이 된다.

엄마에게도 김선경·준영씨 모녀의 영상 인터뷰를 보여주며 “엄마 성으로 바꿔보려고 한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봤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그냥 김씨로 살아’라고 할 줄 알았던 엄마는 “정씨로 살라”며 좋아하셨다. 아버지에게는 곧 찾아가 동의서를 써달라고 부탁할 생각이다.

유원씨가 결혼할 때 엄마는 딸에게 결혼하지 말라 했다. 스무 살까지는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엄마는 유원씨가 성인이 되자 ‘결혼 생활의 불평등’에 대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가와 친정이 한 마을이었지만 명절에 친정에 가기 어려웠던 날들, 시가의 갈등 상황은 엄마를 힘들게 했다. 유원씨도 결혼 후 시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명절엔 항상 시가부터 가야하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전남편은 왜 2010년대에도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유원씨의 질문에 “그럴 거면 왜 한국 남자랑 결혼했느냐”고 했다. 결국 그는 이혼했고 엄마는 딸에게 이혼을 잘 했다고 했다.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원들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원들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혼 가정이지만 유원씨가 성인이 돼서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에 법원에서 성·본 변경 청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지는 알 수가 없다. 법원의 허가 가능성이 높지 않아도 ‘부성’이 기본값인 세상에 ‘작은 금’이라도 내보고 싶다. 유원씨는 “가부장적 사회의 잔재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한 발자국이었으면 좋겠다”며 “중간에 길이 끊어지고 돌아가는 시기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부성우선주의는 바뀔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유원씨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성·본은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얻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져보지 못한 권리를 남성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이 갖고 있는 것”이라며 “호주제 폐지 후 ‘성’은 가부장제의 핵심이자 마지막 남은 실낱 같은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프로젝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소식에 ‘위로’를 많이 받았다. “우리 다같이 할 수 있다는 ‘든든한 안정감’이 들었어요. 청구가 인용되든 아니든 상관없이 우리가 함께 프로젝트를 함께 해내고 있다는 부분이 위로가 됩니다.”

현재 정보팀에서 프로젝트를 돕고 있다. 유원씨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다보면 ‘삐그덕’하는 순간도 있지만 그럼 누군가 ‘제가 할게요’라고 손을 든다”며 “모두 함께 자동차를 만들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동차가 굴러가려면 핵심이 엔진이죠. 그러나 엔진만 있어서는 안돼요. 바퀴도 있어야 하고 크랭크축도 있어야 하고 인테리어도 해야 하잖아요. 원래 김준영 작가라는 엔진 하나였는데 바퀴를 하겠다는 사람, 사이드미러를 하겠다는 사람, 내부 인테리어를 하겠다는 사람이 계속 모이면서 자동차가 완성되어 가는 기분이 들어요.”

- 김유원씨(가명)

김아람 “잊혀지지 않게 계속 북을 치는 사람”

김아람씨(39)는 2017년 결혼했다. 혼인신고할 때 모성을 쓸 수 있다는 항목에 표시를 못했다. 그때는 혼인신고 때 표시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자신의 성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기사를 보고 이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성을 아이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고 헌법소원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내 성을 먼저 엄마 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팟캐스트 비혼세를 통해 준영씨 사연을 듣고 “크게 고민하지 않고 신청했다”고 말했다. ‘엄마 성’으로 성·본 변경을 하면 ‘고씨’가 된다. ‘김아람’보다 ‘고아람’이 어감상으로도 마음에 든다.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팀’이 제작한 ‘엄마 성 빛낸 우리들’의 명찰이다. 이아름 기자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팀’이 제작한 ‘엄마 성 빛낸 우리들’의 명찰이다. 이아름 기자

가볍게 시작했지만 자료집 편집을 하면서 민법 등을 살펴보게 됐고 성을 바꾸는 것은 큰 일이구나 느끼고 있긴 하다. 지난 주말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아버지는 “유난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아람씨는 “아빠한테 농담으로 난 아빠 편이니까 아빠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동의서를 달라고 말해보려고 한다. 아빠도 자신이 반대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다.

이런 시도가 법원 인용 결정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안다. 아람씨는 그럼에도 “시끄러워졌으면 좋겠다”며 “낙태죄 폐지 이후 보완 입법이 되지 않는 것을 봐도 이렇게 잊혀지고 있는 여성 이슈들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말했다.

“잊혀지지 않게 계속 시끄럽게 북을 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람들이 이 사안에 대해 한 번만이라고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100여명이 한꺼번에 청구하면 한두 케이스는 인용되지 않을까요.”

한편 아람씨는 출생신고 때 아이의 성·본을 결정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혼인신고 때는 아이의 성까지 고려하기 어렵지만 임신 이후에는 아이의 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은 주변 결혼하는 여성들에게 엄마 성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혼인신고 때 표시할 수 있는 항목이 있다는 걸 알리고 있다.

현재 아람씨는 편집팀에서 자료집 편집 총괄 역할을 맡고 있다. 그가 혼인신고할 땐 주변에 자신의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람씨는 “지금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 옆에 존재한다는 ‘감각’이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김산하 “‘굳이’라는 표현은 폭력적이다”

김산하씨(34)는 ‘이런 프로젝트도 가능하다니’라는 호기심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플랫 뉴스레터를 통해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를 접하게 됐고 김선경, 김준영 모녀의 영상 인터뷰를 봤다. 딸이 외롭지 않게 “나부터 엄마 성으로 바꿔야겠다”는 선경씨의 얘기에 눈물이 났다. “어머님 세대에는 딸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했을 텐데 당신대에 시작하지 않은 일을 딸을 위해서 나선다는 것 자체가 감동적이었어요.”

산하씨는 김해 김씨이나 할아버지가 족보를 새로 만들었고 자신의 ‘시조’라고 늘 말씀하셔서 ‘전통의 성’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혼인신고 때는 모성을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올해 임신을 계획 중이지만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순 없게 됐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혼인신고 때 ‘표시’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산하 씨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산하 씨가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엄마 성을 이어받아 ‘오산하’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오산하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서운하지 않을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해가 되면서도 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엄마들은 지금껏 섭섭하지 않았단 말인가.’

부성우선주의에 대해 크게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 없었다. 전통이 만들어져온 과정이 있을테니 그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다만 김준영 작가가 엄마 성을 쓰겠다고 하면 주변 친구들조차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느냐’라고 반응한다는 부분에 마음이 쓰였다. 부성우선주의에 대해서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굳이’라는 표현은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부성우선주의는 잘못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기획 업무를 맡고 있어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에선 홍보팀 일을 돕고 있다. 산하씨는 “‘엄마 성을 써보겠다’는 접점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일을 도모하고 있다”며 “절대 만날 일 없던 사람들이 만나 같은 일을 한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유미 “이제 ‘차유미’로 살 겁니다”

김유미씨(50·가명)는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성은 ‘차’여서 성·본 변경 청구가 받아들여지면 ‘차유미’가 된다. 5남매를 혼자 키운 엄마 성을 이어받고 싶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와만 상의하면 되니까 어떤 면에선 마음도 편하다. 유미씨는 “살 만큼 살았는데 이제 엄마 성으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형제 자매들과 성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이제 형제들 1년에 2~3번 밖에 보지 못하는데 형제들 성이 꼭 같아야 하는 건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은 건 2003년으로 2008년 호주제 폐지 전이었지만 왜 자신의 성을 줄 수 없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임신 후 열 달 동안 고생했고 출산도 힘들었는데 뭔가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억울한 마음이 남아 있었는데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 GONE>에서 혼인신고할 때 엄마 성을 따르겠다고 하고 표시하는 장면을 보고 ‘이렇게 신고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알게 됐다.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원들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프라자에서 ‘엄마 성 빛내기’ 프로젝트 조력팀원들이 성본 변경 청구서 작성 세미나 준비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출생신고도 아니고 혼인신고할 때 아이의 성을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미씨는 “혼인신고 때 표시하게 하는 게 행정적으로도 더 복잡하지 않을까”라며 “지난 정부에서 출생신고 때 결정하도록 바꾼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정부가 바뀌고 그런 논의들이 쏙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접하고 ‘내 성을 바꿀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하게 됐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이미 주변 친구들에게 ‘차유미’라고 불러달라 하고 있다. 바뀐 성으로 살아가는 기분이다. 주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유미씨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자신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꿔 불러 보면서 엄마 성이 좋다거나 아빠 성이 익숙하다는 반응을 내놨지만 ‘뭐하러 성을 바꾸느냐’라고 말하진 않았다.

“제 성이 바뀌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어요. 저는 이제 차유미라는 이름으로 살 거니까요. 다만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바위에 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듯 시도하고 싶습니다.”


100여명이 법원에 성·본 변경 청구를 해도 얼마나 인용될지는 알 수 없다. 유미씨는 “일단 성공하는 분이 몇 명이라도 나와서 판례가 쌓였으면 좋겠고 이런 프로젝트가 2회차, 3회차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쌓여가다보면 ‘엄마 성’을 쓰는 일도 일반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보고 싶습니다.”


▼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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