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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팀이 새로운 시선과 시도로 완성된 콘텐츠를 ‘플랫pick’으로 추천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담은 영상과 서적 등을 소개합니다. 이번 ‘pick’은 국가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을 당사자의 목소리로 기록한 두 편의 영화 <보드랍게>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입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흔히 소녀 혹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수차례 영화 소재가 됐는데, 처음에는 주로 ‘일본군의 총검 앞에 강제로 끌려간 소녀’로 그려졌다. 몇몇 영화는 여성들의 피해자 면모를 부각시키려 이들이 겪은 폭력을 선정적이거나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이 겪은 일을 세계에 알린, 투사·활동가가 된 여성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에도 위안부 문제는 종종 유일한 가해자가 일본인 것처럼,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일본에게 사과만 받으면 해결될 문제처럼 납작하게 읽혔다.

고 김순악 할머니. ㈜인디플러그 제공

고 김순악 할머니. ㈜인디플러그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는 김순악 할머니(1928~2010)의 생애를 통해 해방 이후 위안부의 삶을 포착한다. 10~20대 때 끌려간 소녀가 고국에 돌아와 백발이 성성해 자신이 겪은 전시 성폭력 공개 증언을 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비췄다. 한국 사회는 돌아온 여성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당한 게 뭔지도 모르고 몇십 년을 지냈다. 그 시절만 생각하면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터놓을 곳도 없었다. 성폭력이라는 말도 없던 시대다. 강간을 당해도 피해자의 수치로 여기던 사회다. 삶은 숙제처럼 밀려왔다. 경험한 세계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할머니는 유곽에 팔려가 성매매를 하기도, 미군 기지촌에서 ‘색시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을 해도 지나고 나면 손에 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마음이 폐허였다.

“아가씨나 머시매(남자)나 얼래(아이)나 (…) 내 이야기 해가지고(하면) ‘어이구 그랬구나’ ‘하이고 참 애뭇다(애먹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표현한 이재임 작가의 애니메이션. ㈜인디플러그 제공.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할머니의 모습을 표현한 이재임 작가의 애니메이션. ㈜인디플러그 제공.

훗날 활동가들을 만난 할머니는 그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한다. 할머니의 경험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사회는 결국 그를 수십년간 침묵하게 했다. 위안부 운동은 강제 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우익 세력이 피해자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매춘부였다고 주장한 탓도 있지만, 한국 사회 역시 그들에게 ‘순결한 피해자’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경험은 전형적인 서사에 오려 맞춰졌다. 여기 딱 들어맞지 않는 경험을 가진 이들은 운동의 중심에 서지 못했다. 김순악 할머니 역시 공식 석상에서는 유곽에서 일한 사실이나 색시장사를 했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떤 경험은 활동가들 앞에서도 숨겼다. 기지촌 시절 미군과 사이에 낳은 둘째 아이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남의 아이를 기른 것뿐이라고 말했다. 할머니 표현에 따르면 “이런 말을 할 데가 없었는데, 자꾸자꾸 말이 나오게 만든다”는 연구자 안이정선씨를 지속적으로 만나고 나서야 할머니는 이러한 사실을 털어놨다. 말로, 예술로 이야기를 풀어낸 할머니는 비로소 웃고 춤추고 노래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막는 2차 가해는 여전히 공고하다. 영화는 10년 전 사망한 김 할머니의 구술을 살아있는 미투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읽어낸다. 할머니와 같은 말씨를 쓰는, 대구 지역 출신의 성폭력 생존자들이다. 연출을 맡은 박문칠 감독은 “일본의 잘못을 성토하는 목소리에 비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못한 한국 사회의 책임에 대한 지적은 상대적으로 덜 들리는 것 같다. 위안부를 바라보는 좁은 틀을 확장시켜 당사자만의 문제나 한·일 양국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도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과도 이어지는 문제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투 당사자 박혜정씨는 “나는 (성폭력) 피해 10년 뒤에 미투를 했다. 위안부 경험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할머니가 왜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는지, 평생 지배해 온 아픔을 어떤 마음으로 외치셨는지 공감이 됐다”고 했다.

또 다른 국가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 미군 기지촌 여성을 오롯이 당사자의 방식으로 불러낸 영화도 나왔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뒤에도 군인을 ‘위안’하는 제도는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외화를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기지촌을 조성해 성매매를 조장하고 성병 등을 관리했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의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여전히 제대로 읽히지 않는 미군 기지촌을 당사자 박인순씨가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전에도 박경태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주인공이 된 박씨는 이번에는 “(미군인) 전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출연 조건을 내걸었다.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시네마달 제공.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시네마달 제공.

당사자인 박씨가 출연하는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겹쳐진다. 박씨는 한국전쟁 때 고아로 버려진 뒤 서울역에서 짜장면 세 그릇을 사준 이의 손에 이끌려 미군 기지촌에 팔려갔다. 박인순이라는 이름은 그때 얻었다. 기지촌에서 죽은 이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렇게 ‘벌’에 살게 됐다. 주변에 배나무밭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번 발 디디면 빼도 박도 못한 채 나갈 수 없는 곳’이라 이렇게 불렸다고도 했다. 여기까지는 실화다. 영화는 귀신과 저승사자를 등장시키며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넘나든다. 여자들은 죽어 귀신이 돼서도 뺏벌을 나가지 못한다. 저승의 명부조차 이들의 이름과 삶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박씨의 삶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 법정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미군 위안부 피해기록을 얻어내려 한 교수, 미군 기지촌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는 미술작가 등은 박씨 곁에 머물지 못하고 뺏벌을 도망치듯 떠난다. 박씨의 삐죽빼죽한 경험과 기억은 그들이 만들어낸 서사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타인의 입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박씨는 결국 저승사자도 물리친다. 그는 미군인 전 남편의 목을 딴 뒤 줄에 묶어 질질 끌며 스스로의 걸음으로 당당하게 저승으로 향한다.

저승으로 향하는 박인순씨. 시네마달 제공.

저승으로 향하는 박인순씨. 시네마달 제공.

두 영화는 사회가 그동안 이들의 경험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우리는 김순악을, 박인순을 모른다. 김순악과 박인순의 진짜 이야기는 듣는 이가 공감할 준비가 돼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지난달 27일 개봉했고, <보드랍게>는 오는 23일 개봉한다.


오경민 기자 5k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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