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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적인 결혼식은 무엇일까.’

직장인 오은주씨(34·가명)는 최근 ‘페미니스트’인 두 친구의 결혼식을 다녀오고 이런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한 친구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가부장적 관습들을 제거하기 위해 공을 들였어요. 청첩장에는 신부 이름을 먼저 올렸고, 신랑과 신부는 동시 입장했어요. 평등한 결혼생활을 위한 혼인서약서도 낭독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친구는 똑같은 이유로 정반대 결혼을 올렸습니다. 플래너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정해진 문법을 충실히 따른 ‘공장형 웨딩’을 치렀어요. 웨딩드레스부터 식장까지 모든 선택의 기준은 ‘가성비’였습니다. “결혼식에는 영혼을 조금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죠.

그래픽 이아름 기자

그래픽 이아름 기자

나도 결혼을 하게 될까? 그렇다면 어떤 결혼식을 하게 될까? 오씨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수년간 만난 이성 파트너가 있지만, 굳이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언젠가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할 뿐입니다.

페미니즘은 결혼에 대한 여성들의 태도를 빠르게 바꾸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결혼적령인구라 불리던 19~49세에서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한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남성 12%, 여성 5%에 그쳤습니다. 여성에게만 돌봄의 부담을 강요하고, 돌봄 노동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해 온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누적된 결과일 것입니다.

2018년 이후 미혼 여성 혼인 의향 변화를 연구 중인 홍혜은 페미니스트 연구활동가는 “많은 여성들이 지금의 결혼 제도, 즉 결혼으로 생기는 친족 관계망에서 여성들에게 부여되는 위치나 역할에 반발한다”며 “결혼식은 지금의 제도가 여성을 어떻게 보는지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이벤트”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혼을 보는 여성들의 시선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홍 활동가는 통계청 사회조사에서 ‘결혼을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고 응답한 미혼 여성 비율이 3분의 2에 육박하는 점(2020년 기준 62.4%)에 주목해요. 결혼을 선택하자니 ‘지금의 결혼 제도 하에서도 내가 나로 살 수 있을까’ 망설여지고, 비혼을 선택하자니 ‘사회 생활에서 탈락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남는 것이죠.

홍 활동가는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는 여성들과, 좋은 사람이 없어 결혼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은 사실 같은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과 개인이 가장 안정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이자, 가족 단위로 제공되는 여러 사회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결혼식은 여전히 공고한 가부장적 사회 제도 앞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플랫은 이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결혼식의 모습이 있는지’ ‘결혼식에 갈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물었어요. 10월7일부터 14일까지 인스타그램과 뉴스레터를 통해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총 56개의 응답을 수집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이성 파트너가 있다는 한 독자는 “아버지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지 않는다”를 포함해 4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또다른 독자는 “결혼을 준비하는 내내 가부장제에 부역하는 것 같다는 죄책감을 느꼈다”고 호소했죠. 누군가에게 결혼식은 내가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임을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비혼을 결심한 한 독자는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 꽃으로 꾸민 공간, 예쁜 바비인형처럼 앉아있는 신부를 보며 환멸을 느낀다”고 말했어요. “법적 결혼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는 성소수자 독자들도 있었고요.

페미니즘은 결혼식의 풍경을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독자들이 플랫에 보내주신 의견을 소개합니다. 답변은 길이와 명확성을 위해 편집되었습니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세웠다

🙍‍♀️“신부대기실에서 수동적으로 앉아만 있는 게 싫었습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는데 불편한 드레스, 헤어 등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신부나 신랑의 행진, 주례는 안 할 예정입니다. 둘이 서로 존중하며 살기 위한 규칙들을 혼인서약서 형태로 낭독하고, 양가 부모님에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조언을 받기로 했습니다. 사촌 이내만 초대한, 편하고 즐거운 모임을 기획하고 싶은데 어른들도 모시고 행사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네요.”

🙍‍♀️“결혼하고 싶은 이성 파트너가 있는 페미니스트 여성입니다. 결혼식에서 ‘이것만은 타협할 수 없다’ 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요.

1. 아버지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하지 않는다

2.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는다

3. 나를 전시품처럼 있게 하는 드레스는 입지 않을 것이다

4. ‘버진로드’라는 단어가 언급되지 않게 할 것이다

배우자와 동등한 주체로서 가정을 꾸려나가려면, 그 시작점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결혼식은 그 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결혼 예정이지만 한국 남성과의 결혼은 페미니즘에서 멀어진 행보라고 생각해요. 감정에 눈이 멀어 가부장제에 일조하는 선택을 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그래서 소셜미디어(SNS)에 연애나 결혼 과정을 전시하는 것은 일절 하지 않고 있어요. 이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픽 이아름 기자

그래픽 이아름 기자

달라지는 결혼식의 풍경을 목격하다

🙍‍♀️“저는 유럽에 살고 있어요. 지난 주말 지인의 결혼식에 다녀왔는데요. 한국에서는 결혼식의 주인공이 부부의 부모님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곳의 주인공은 온전히 결혼하는 부부였어요. 부모님 지인은 부부의 대부와 대모 외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어요. 부부의 가족이라고 특별히 화려하게 차려입지도 않았고요. 부부의 취향으로 꾸민 공간에서 다 같이 식사하며 대화하고 온종일 파티하고 즐기는 문화도 좋았습니다. 제 인생 이렇게 즐거운 결혼식은 처음이었던지라, 공장처럼 찍어내는 한국의 결혼식이 떠올라 좀 슬퍼졌어요. 한국의 결혼 문화도 더욱 자유롭고 다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결혼식 풍경이 있어요. 부케는 남자 사람 친구가 받았고, 청첩장에 신부 이름이 먼저 적혀있었습니다. 신부도 아버지와 입장하고 신랑도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했어요.”

🙍‍♀️“지인의 새로운 삶을 축하하는 자리인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예전의 보수적인 결혼식 문화에 비해 당사자들의 자기 표현이 조금 더 자유로워진 것 같아 식 자체에 대한 불편함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결혼’의 모습을 상상하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결혼을 생각해보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비혼’이라고도 외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동반 입장을 하고 내 이름이 먼저 오는 청첩장을 찍을 거예요. 막상 결혼하게 된다면 본식 드레스는 포기 못 할 거 같아서 2부엔 수트를 입고 돌아다니고 싶어요. 웨딩촬영도 수트를 입고 찍을 거고요. 한편으로는 결혼 자체가 가부장제로 걸어 들어가는 건데, 왜 나는 이를 염두에 두고 있나 생각이 듭니다.”

🙍‍♀️“아직까지는 내 돈과 시간을 오직 나만을 위해 사용하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이 좋아, 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치관이 비슷하고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면 ‘평생의 친구’ 느낌으로 결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결혼식에 갈 때마다 신부가 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해서 신랑에게 전달되는 것이 가장 불편했어요. 신부의 보호자가 아버지에서 신랑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고 들었는데, 왜 여자만 항상 누군가의 보호 대상으로 남아있어야 할까 의구심이 들었거든요. 만약 제가 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혼자서도 멋지고 당당하게 입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 서운해하시겠지만요.”

🙍‍♀️“결혼은 하고 싶지만 가부장제에 종속되긴 싫어요. 결혼은 내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모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때 할 거예요. 결혼식도 ‘굳이 해야하나’ 싶은데, 만약 하게 된다면 저도 활동하기 편한 정장을 입고 손님맞이를 할 겁니다. 그냥 흰색 정장에 짧은 면사포만 써도 예쁠 것 같아요.”

그래픽 이아름 기자

그래픽 이아름 기자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레즈비언입니다. 당장은 결혼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없지만, 둘 다 직업적으로 안정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동성 결혼이 법적으로 가능해진다면 시기가 더 당겨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남녀가 아닌 여성끼리도 안정적 가족을 꾸리고 싶은 사람들이 저 말고도 꽤 있겠지요.”

🙍‍♀️“저는 4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와 4년째 동거를 하고 있어요. 남자친구는 제가 못하는 집안일을 잘하고, 저는 돈을 더 많이 버는 대신 생활비를 조금 더 보태고 있어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 오히려 편하더라고요. 남자친구와 대화를 충분히 나눈 후, 서로 합의 하에 헤어지거나 누구 하나 죽기 전엔 그냥 이렇게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저나 남자친구 가족을 포함한 주위에서는 ‘결혼 안 하냐’ ‘이건 서류에 도장만 안 찍었을 뿐 부부다’ ‘서류로라도 혼인신고를 해라’ ‘결혼 안 하고 애 안 낳는 건 이기적이고 불효다’라고 말해요. 솔직히 저는 그게 왜 이기적이고, 불효인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나이가 30대 중반을 지나다보니 주변 친구 절반은 기혼입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여러 번 가봤는데 그냥 너무 뻔하고 지루해요. ‘복사 붙여넣기’ 한 듯 꽃으로 꾸며놓은 공간, 정장 말끔히 차려입고 손님맞이하는 남자, 예쁜 바비인형처럼 앉아 있는 여자… 볼 때마다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요.

그렇게 왁자지껄 결혼하고선 속내를 까보면 그리 행복하게 살고 있지도 않던데…. 그냥 적당히 살다 헤어지겠다는 저에겐 왜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저의 결정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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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에 갈 때는 늘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신부,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인사하는 신랑,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의 손을 건네주는 행위 등.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함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요. 물론 웨딩 수트를 입고 동시 입장을 하는 결혼식이 많아졌다지만 사실 저는 본 적이 없어요. 해외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초대받았을 때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라 안타깝고 바뀌었으면 싶어요.”

완전한 ‘선택’이 된 결혼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고, 결혼식은 이를 공식화하는 사회적 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그 형식에 살을 너무 많이 붙이는 것 같아요. 여성을 ‘노동력’으로 보고 넘겨주는 듯한 과거의 잔재를 발견할 땐 불쾌하기도 하고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결혼식이 고안되었으면 좋겠어요.”

🙍‍♀️“비혼을 다짐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결혼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과연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가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 여전히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전 결혼식만 가면 눈물이 납니다. 주로 신부 측 지인으로 가다보니 ‘꼭 해야만 할까’ ‘그래도 이왕 결혼하기로 했다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주책이죠.

그래도 지금까지 청첩장 받은 결혼식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갔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기쁜 일은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축의금은 솔직히 아깝고 ‘비혼식’이라도 해서 돌려받고 싶어요. 그래도 한국 정서상 축의를 안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이 나타나도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아요. 특히 결혼식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요. 양가 친지들이 모여서 이렇다 저렇다 훈수만 드는 결혼, 너무 스트레스 받고 싫어요.”

🙍‍♀️“확고하게 결혼 생각이 없는 비혼입니다. 결혼식은 사회생활,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서 갑니다. 물론 결혼하는 사람을 축하하는 마음은 기본이고요.”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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