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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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13일.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의 절규는 2020년에도 진행형입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편법 고용 등 개선되지 않은 노동 현장에서 법의 보호망 밖에 서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19’는 한국 노동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대면 노동 비율이 높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감염 위험에도 더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초단기 노동과 특수고용직 여성 노동자들은 재난과 같은 감염 사태에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맞은 2020년, 이 같은 불공평한 현실을 바꾸고 노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전史(사)’. 여성 전태일 이야기입니다.



‘함께 가야 지치지 않고, 같이 가야 오래간다.’ 파리바게뜨지회 사무실 입구 ‘응원의 한 마디’ 게시판에 적힌 문구다.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건물 지회 사무실 문을 열자 임종린 지회장과 최유경 수석 부지회장이 일어서 기자를 맞았다.

단풍이 물든 건물 앞 화단에서 촬영부터 시작했다.

“사진 찍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던 임 지회장은 긴장한 듯 “아” 짧은 탄식을 뱉었다. 최 수석이 촬영 중인 임 지회장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자 큰 웃음이 터졌다. 최 수석이 말했다. “노조 단톡방에 인터뷰한다고 알렸더니 기대된다고 난리예요.”

사무실 책상에 임 지회장, 최 수석과 마주 앉았다. “잠시만요.” 임 지회장이 스케치북과 연필을 가져왔다. 용도를 금세 알게 됐다. 파리바게뜨 본사(SPC)·협력사·제빵기사·가맹점주 4자 관계를 이해하려면 도식화는 필수였다. 임 지회장이 스케치북에 피라미드를 그려 제빵기사 직무 구조를 설명했다.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임종린의 인생은 2017년 완전히 뒤집혔다. 회사의 부당함을 토로하기 위해 정의당 ‘비상구’를 찾았다 노조까지 만들어버린, ‘어쩌다 영웅’ 임종린의 이야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자영 캐릭터의 토대가 됐다. 임종린 파리바게뜨 지회장이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건물 앞 화단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이준헌 기자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임종린의 인생은 2017년 완전히 뒤집혔다. 회사의 부당함을 토로하기 위해 정의당 ‘비상구’를 찾았다 노조까지 만들어버린, ‘어쩌다 영웅’ 임종린의 이야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자영 캐릭터의 토대가 됐다. 임종린 파리바게뜨 지회장이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건물 앞 화단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임 지회장은 1984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외환위기 때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경북 상주로 이사했고, 경기 시흥을 거쳐 인천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만 세 번 옮겼다. 꿈이 없었다. 대학은 한 학기만 다녔다. 20대 초반 다단계 회사에 들어갔다 도망쳤다. ‘어쩌다’ 파리바게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엉겁결에’ 협력사 제빵기사가 됐다. ‘핵심 인재교육’을 받고, 승진도 했다.

‘본사직 전환 기회’는 말뿐이었다. 유리천장에도 부딪혔다. 회사는 ‘교육 수당 5만원’마저 뺏어갔다. 돈 5만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부당한 처사에 좌절하고, 분노했다. 투쟁의 시작이었다. 빼앗긴 수당을 돌려받으려고 정의당 노동상담창구 ‘비상구’를 찾았다. ‘불법파견’의 뜻을 그날 처음 알았다. 문제를 공론화했다. 노조를 만들었다. 아직도 싸운다.

‘좌절했다’와 ‘아직도 싸운다’ 두 문장 사이의 곡절, 임 지회장의 투쟁기를 듣는 데는 3시간도 모자랐다. 여성, 청년, 비정규직·하청 노동자. 노동 취약계층이 주축이 돼 2017년 설립한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노조는 한국 노동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룹 소녀시대 노래를 투쟁가로, 동료와 함께 흘린 눈물을 동력으로 회사와 ‘맞짱’ 뜬, 임 지회장 이야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자영(고아성) 캐릭터의 토대가 됐다. 영화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내 얘기가 영화 토대라는데…회사와 맞짱 뜨고 ‘어쩌다 영웅’ 됐지만 섬처럼 흩어진 점포서 꿋꿋하게 함께한 제빵기사들이 ‘진짜 영웅’이죠”

- 영화는 보셨죠.

“이종필 감독님이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 기사를 봤어요. 제 이야기가 주인공 자영의 토대가 됐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다가 회사와 어쩔 수 없이 싸우는 이야기인가?’하고 생각했죠. 예고편이 나왔을 때부터 관심 있던 터라 극장에서 봤어요. 자영이 가진 ‘기운’은 저와 비슷했어요. 나머지는 많이 달랐고요(웃음).”

- 개인 경험을 떠올리게 한 장면이 있다면요.

“친구들끼리 모여 술 마시면서 우는 장면이요. 회사에서 힘들었던 얘기하면서 막 울잖아요. 저도 친구들 만나면 울고 그랬거든요. 웃고 떠들다가도 ‘있잖아. 내가 회사에서….’ 입만 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회사와 ‘맞짱’ 뜬, 임종린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의 이야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자영(고아성) 캐릭터의 토대가 됐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회사와 ‘맞짱’ 뜬, 임종린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의 이야기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자영(고아성) 캐릭터의 토대가 됐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봤어요
감독님이 제 스토리 언급했을 때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게 살다가
싸우는 이야기로 생각했어요



- 대학은 왜 그만뒀나요.

“대학을 가긴 가야겠고, 인천 전문대를 갔어요. 인천 주민은 등록금이 쌌거든요. ‘수포자’(수학포기자)였는데 공대인 화상인쇄학과로 갔어요. 잘못 선택한 거죠. 공업수학을 배워야 했어요. 아뿔싸, 대학 가면 수학을 안 할 줄 알았는데. 큰일 났다 싶었죠. 한 학기만 다니고 휴학했고. 졸업은 안 했어요. 아르바이트하며 지냈어요. 홈플러스에서 일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것도 불법파견이었어요. 전화기 업체 직원인데, 홈플러스 주임이 저희를 관리했거든요. 1년쯤 다니다 퇴사했어요.”

- 다단계 회사에 끌려갔던 이야기가 유명한데요.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대학 동아리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서울에 취직했는데, 회사가 되게 재밌대요. 부럽네, 재밌겠네! 그러고 있었는데,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대요. ‘요구르팅’이란 게임 회사에 알바 자리가 있다면서요. 게임은 안 좋아했는데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갔어요. 게임과는 상관없는 다단계 회사였어요. ‘요구르팅’은 그냥 친구가 좋아하는 게임이었나 봐요. 거여·마천 쪽에 회사가 있었는데, 가자마자 1주일 합숙에 끌려갔어요. 도망을 못 치게 했어요. ‘이건 다단계니까 넘어가지 말자’고 종이 귀퉁이에 ‘아니 불(不)’을 쓰며 버텼어요. 잘 버티다 마지막 날 넘어갔죠(웃음). 빌라 반지하에서 20여 명이 같이 살았어요. 이상하게 당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어묵 한 봉지를 사서 30인분 국을 끓여 먹던 기억은 나요. 서너 달쯤 있다 도망쳤어요. 전화번호도 바꾸고 SNS도 다 삭제하고 잠적했죠.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절 찾으러 다닌 가족들에게 미안해요.”

빚 때문에 시작한 알바에서
제빵기사 되고 승진도 했지만
소모품 취급만 당했어요
회사 얘기하면서 많이 울었죠



- 파리바게뜨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요.

“다단계 회사에 있으면서 고등학교 친구에게 100만원 조금 넘게 돈을 꿨어요. 그 친구가 유학 날짜가 잡힌 거예요. 돈을 돌려달라면서 동네 파리바게뜨에서 일이라도 해서 갚으래요. 단순 알바였어요. 오전 7시 출근해서 물류 박스 정리하고, 빵 진열하고, 손님 상대하는 일을 했어요. 돈은 금방 갚았어요. 반년 정도 일하다 제빵기사님 눈에 들었어요. ‘너 일 잘하니까 빵 (만드는) 일도 잘할 것 같다’라면서 이력서를 넣어보래요. 빵 먹는 건 좋아했지만, 만들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해볼게요’ 하고 지원은 안 했어요. ‘어떻게 됐냐’고 해서 ‘떨어졌나 봐요’ 답했더니 기사님이 화를 내며 회사에 전화를 걸었어요. 옆에 서 있는데 정말 식은땀이 났죠. 기사님이 ‘이력서가 안 들어왔다’고 하는데, 속으로 ‘당연하지’ 그랬어요. 회사에서 직접 오라고 해서 밤새 자기소개서를 쓰고 다음 날 신도림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갔어요.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라고 하면 본사(SPC)와 계약한다고 생각잖아요. 그게 아니었어요. 협력사였는데, 그땐 본사랑 뭐가 다른지도 잘 몰랐죠. 12주 교육을 받고 제빵기사가 됐어요. 2007년이었어요.”

- 제빵기사를 훗날 만난 적 있나요.

“이후에 만나거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어요. 같이 일할 때도 제가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니라서 기사님과 대화를 많이 안 나눴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도 참 이상한 분이에요.(웃음)”

- 4년 만에 지원기사(담당 지역 내 가맹점을 돌며 제빵기사 인력을 대체하는 역할)로 승급했어요.

“지원기사는 좀 늦게 됐어요. 2010년 무렵은 SPC가 한창 사업을 확장할 때라 점포 수에 비해 제빵기사가 부족했거든요. 경력 1년도 안 돼 지원기사가 된 사람이 수두룩했어요. 편한 분위기여서 첫 점포에서만 3년을 일했어요. 그렇게 일하다 사장님이 바뀌면서 점포를 옮기게 됐죠. 맨 처음 아르바이트했던 점포의 메인 제빵기사로 갔어요. 1년 뒤 지원기사가 됐고, 또 한 번 진급해 교육지원기사가 됐어요.”

전환 1순위 ‘인재’, 마주한 유리천장



교육지원기사 직책은 2014년 신설됐다. 그전까지 신입기사를 포함한 제빵기사를 관리·교육하는 일은 본사 품질관리자(QSV) 업무였다. 본사 직원이 협력사 직원을 관리·교육하는 건 불법이다. ‘불법파견’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협력사에 신입기사를 교육할 교육지원기사 자리가 생겼다. 지원기사 중에서도 ‘조장’ 역할을 하던 임 지회장은 신설 첫해에 교육지원기사로 선발됐다.

- 원치도 않던 제빵기사 일을 권유받고, 기사가 된 후 승진도 곧 했어요. 비결이 뭐죠.

“기본적으로 힘이 좋아요. 우유 팩 정리할 때 보통 유통기한 확인하고 하나씩 정리하잖아요. 저는 한꺼번에 여러 개 들어서 냉장고에 딱 넣고, ‘빵짝(빵 상자)’도 세 짝씩 들고요. 일 속도가 빨랐어요. 잘해야겠단 생각은 안 했는데, 빨리 익숙해지려 노력했어요.”

- 협력사에선 본사직 전환에 대한 선망이 컸을 것 같아요.

“다들 ‘열심히 해서 본사 가야지’ 하는 생각만 했어요. 회사가 주입한 것도 있죠. 교육지원기사 할 당시 ‘핵심 인재교육’이란 걸 했는데 제가 1기였어요. 1주 교육을 받았는데, ‘너희는 회사를 이끌 차세대 핵심 인재이고, 본사직 기회가 있으면 1순위’라는 말을 들었어요. 2014년쯤엔 SPC 전 계열사 모범사원에 뽑혀서 태국에 다녀왔어요. 협력사 직원은 저까지 해서 2~3명 정도 있었어요. 이후엔 가시밭길을 걸었지만요. 일 년에 두 번 있던 본사 전환 시험이 폐지됐거든요.”

- 교육지원기사 때 힘들었다고요.

“신입기사 현장 적응을 시키는데 제때 점심을 먹은 적이 없어요. 신입은 일이 서툴러서 할당된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데 시간이 더 걸리거든요. 새벽 5~6시 출근해서 만드는데도 여유가 없어서 점심시간 없이 일해야 했어요. 옆에서 지켜보는데 신입기사님께 ‘혼자 밥 먹고 오겠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같이 굶거나 제 돈 들여 기사님 몫까지 음식을 사 와서 해결했어요. 빵을 만들다 손실이 나면 기사가 비용을 메우거든요. 그것도 메워드리고요. 그러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어요.”

- 어떤 일이죠.

“조장과 교육지원기사를 겸했는데, 회사에서 ‘다음 달부턴 조장 수당 7만원을 못 준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희 라인에 조장은 저 포함해 여자 기사 두 명이었어요. 둘 다 조장직에서 내려오라고 했어요. 본사 전환 길도 막힌 상황에서 있던 자리마저 뺏은 거죠. 그리곤 30대 남자 기사를 그 자리에 앉혔어요. 심지어 동료가 교육하던 기사였어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럴 수 있나’ 본사 관리자에게 항의했지만, 해결이 안 됐어요. 이때 조장직이 남자로 싹 물갈이됐어요.”

- 성비 7 대 3 여초 직군인데도 성차별이 만연했네요.

“일단 협력사 관리자(BMC) 대부분이 남자였어요. 일부 남자 기사들은 자기보다 나이 많고 직급 높은 관리자를 ‘형’이라 불렀고요. ‘형(관리자)이 나보고 나이도 차고 결혼도 했는데 언제까지 현장에서 빵만 만들래 하더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어요. 남자끼리 서로 끌어 준다는 얘기였어요. 제가 교육하던 남자 기사가 제 담당 관리자가 되기도 했고요. 안 되겠다 싶었어요. 교육지원기사를 그만두겠다고, 지원기사로 직급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어요. 회사가 잡는 시늉이라고 하지 않을까 했는데, 안 잡더라고요.”

- 그러던 차에 ‘5만원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지원기사로 내려오고 좀 있으니 이번엔 ‘교육 수당을 회수하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지난 15개월 동안 교육했던 신입기사 중 두 명이 각각 퇴사, 점포 이동을 했다고요. 교육에 실패했으니 신입기사 1인당 5만원씩, 총 10만원의 수당을 토해내라는 거였어요. 퇴사는 그렇다 쳐도 점포 이동까지 교육 실패로 보는 건 너무하다 싶었어요. 차라리 일을 대충하고 다녔다면 화가 안 났을 거예요. 연장수당도 못 받으면서 무급노동하고, 제 돈 써가며 기사들 건사했는데 소모품 취급을 당하는구나. 8개월만 있으면 10년 근속으로 금 7돈을 받는데, 그것도 싫으니 퇴사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 모범사원이 요샛말로 ‘흑화’했네요.

“그전까진 진짜 순종적이었어요. 모난 돌이 정 맞으니 문제 제기는 하지 말자는 거였죠. 어리다 보니 화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고요. 회사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철저하게 ‘회사 편’을 들기도 했어요. 회사 고객이 둘이거든요. 하나는 빵 사는 손님, 또 하나는 가맹점주요. 신입기사 교육할 때 ‘아무리 갑질을 당해도 사장님 눈치를 살피고 일단 무조건 사과해라’고 가르쳤어요. ‘우리 회사는 연장수당 같은 건 없어요’ 이런 교육도 했고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는데, 한 신입기사가 케이크를 만들면서 ‘암요, 그럼요, 사장님!’ 이걸 노래처럼 흥얼대는 거예요. 마지막 신입 직무교육에서 배웠대요. 당시에도 ‘뭐,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해?’ 하고 생각했어요.”

- 부당한 일에 함께 분노해준 동료가 있었나요.

“같이 노조활동을 하는 정혜미 사무장요. 같은 시기 교육지원기사가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5만원 사건 때 먼저 행동에 나선 것도 정 사무장이에요. 본사·협력사 직원이 다 보는 회사 게시판에 글을 썼거든요. 격한 내용도 아니었어요. ‘오면 인사부터 해주면 안 되냐. 어떻게 오면 혼내기만 하냐’ 이렇게 시작한 글이었는데, 삭제처리가 됐어요. 지지 않고 글을 계속 올렸더니, 게시판 관리자가 ‘여기는 개인의 감정을 호소하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한 거예요. 더 화가 났죠. 그럼 어디에 말을 해야 하나. 당시 저, 정혜미, 저희가 교육했던 김소라 기사 셋이 뭉쳐 다녔거든요. 호프집에서 맥주 마시면서 맨날 울었어요. 그때 같이 화내고 울어준 정 사무장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을 거예요. 누가 ‘노동조합은 어떻게 만들어요?’ 물으면 이렇게 답해요. ‘친구 하나 있으면 되지 않겠냐’라고. 제겐 정 사무장이 그 ‘친구 하나’예요.”

[여전史]투쟁을 굽는 파리바게뜨 임종린 제빵사[플랫]

제빵 노동자, 회사와 ‘맞짱’ 뜨다



2017년 4월, 눈물 젖은 맥주를 마시던 두 친구의 운명을 사진 한 장이 바꿨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 횡단보도에 내걸린 정의당 노동상담창구 ‘비상구’ 홍보 현수막을 찍은 사진이다.

- 어떻게 비상구로 갈 생각을 했나요.

“친구가 전화번호가 적힌 현수막을 찍어 보냈어요. 제가 하도 힘들어하니까 무료 상담이라도 해보라면서요. 평소라면 전화조차 안 했을 거예요. 하소연할 곳이 간절했어요. 정 사무장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같이 가보자’고 말했죠.”

- 첫 상담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저흰 5만원 교육 수당 얘기만 반복했어요. 최미숙 노무사님이 종이와 펜을 주면서 업무 구조를 그려보라고 시켰어요. 불법파견, 임금 꺾기 같은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요. 첫 상담이 그렇게 끝났고, 노무사님과 몇 번 전화로 대화를 나눴어요. 자료를 모아 드리기도 했어요. 한 달 뒤 당사자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국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 국회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죠.

“네. 국회 앞에서 정 사무장을 기다리는데 관리자한테 전화가 오는 거예요. 어디서 날 보고 있나? 가슴을 졸이며 이정미 의원실로 갔죠. 정송도 보좌관을 만났어요. 물어보면 답하고, 한창 얘기 중에 보좌관님이 ‘이걸 왜 참으셨어요!’ 하면서 화를 내는 거예요. 어리둥절했어요. 다들 이렇게 일하는 건 줄 알았으니까요. 자료 수집이 가능하겠냐고 물어서, ‘해보겠습니다’ 답했어요. 오래 일해서 소속된 대화방이 많았거든요. 업무 지시받은 대화 내용도 캡처하고, 메일로 받은 업무지시도 다 보냈어요. A4용지 3~4장 분량이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퇴사할 거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겁이 없었어요. 기자회견에서 ‘빵 모양 탈’을 머리에 쓰고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건 거절했어요. 대신 언론사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의혹 기사가 세상에 나왔어요.”

정의당 ‘비상구’ 홍보 현수막 보고
노무사와 국회 보좌관 만나 상담
“왜 참았냐” 화를 내서 어리둥절
다들 이렇게 일하는 줄 알았으니까



- 회사에선 별일 없었나요.

“정의당과 본사가 접촉한 뒤 회사에선 내부고발자 색출에 나섰어요. 관리자한테 연락이 와서 ‘어디 신고한 거 있냐’고 하는데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당연히 발뺌했죠. 매장 안으로 파란(파리바게뜨 로고 색) 목걸이 찬 사람만 들어와도 손을 덜덜 떨었어요. 본사 사람일까봐요. 그 와중에 인천, 교육지원기사, 여자 이렇게 범위가 좁혀졌고, 게시판에 글을 쓴 정 사무장이 의심을 받았어요. 모든 게 스트레스였어요. 관리자랑 통화하다 ‘신고한 거 나예요’ 말해버렸죠.”

-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어요. 의원실에서 조사해보니 저희 말고도 전국에서 부당한 일이 많았대요. 몇 차례 비공식 설명회를 연 뒤 ‘회사의 문제를 알릴 제대로 된 설명회를 열어보자’고 했어요. 보좌관님이 ‘7~8명 모아볼 수 있냐’고 해서 ‘회사 10년을 다녔는데, 50명은 모아오겠다’고 장담했죠. 50명 거의 채웠는데, 소문이 난 거예요. 협력사 관리자들이 남자 지원기사들을 중심으로 전화를 돌렸어요. ‘가면 큰일 난다’ ‘임종린이 네 인생 망친다’라고요. 오기로 한 사람 몇이 빠지고, 40여 명이 모였어요. 천주교 인천교구 노동사목 건물에서 설명회를 했는데, 기사들이 설명을 듣더니 다 놀라요. 특히 본사직 전환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대우가 너무 달랐던 것에 대한 분노가 컸어요.”

- 노동조합이 그날 탄생했죠.

“그전까지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말은 꺼내 본 적이 없어요. 필요성은 느꼈지만, 우리는 어차피 퇴사할 거니까. 민주노총 화학섬유노조 사람들도 이날 설명회에서 처음 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자리가 또 없을 것 같더라고요. 일단 노조부터 만들자. 뭉쳐 다니던 저, 정혜미, 김소라 세 사람이 각각 지회장, 사무장, 수석 부지회장으로 선출됐어요. 박수로요. 이날 참석자 세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노조 가입서에 서명했어요.”

부당한 일에 동료들이 나섰어요
정혜미 사무장·김소라 부지회장
세 명이 노조 출발선에 섰습니다
아직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끝까지 함께, 오래가야죠



- 전국에 흩어진 제빵기사들을 상대로 노조 설립을 알리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소개받아 건너건너 연락을 돌리는 건 홍보에 큰 도움이 안 됐어요. 노조라고 하면 아예 연락받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회의에서 김소라 수석이 SNS를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거예요. 트위터 ‘눈팅’만 하던 사람이라 다른 SNS는 잘 몰랐어요. 뾰족한 수가 없어서 일단 해보라고 했죠. SNS 플랫폼 여러 곳에 노조 계정을 만들었는데, 인스타그램에서 반응이 들어 왔어요. 이미 기사들 교류가 있었더라고요. 케이크 사진 찍어 올리고 서로 칭찬도 하고, 제조 방법도 공유하면서요. 인스타그램을 보고 울산에서 가입 신청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수개월 만에 800여명이 노조에 가입했고요. 지금은 700여 명이 소속돼 있어요.”

-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대한 내부 저항은 없었나요.

“노조가 회사를 공격해서 결국엔 다 망할 거라 말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지금은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이지만, 당시엔 화학섬유노조였거든요. ‘너네 노조 잘못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지금은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이 줄었어요.”

임종린 지회장과 함께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문제를 공론화한 제빵기사 김소라(왼쪽)·정혜미씨.이들은 파리바게뜨 지회의 초대 수석 부지회장·사무장을 각각 맡았다. 서성일 기자

임종린 지회장과 함께 파리바게뜨 불법파견 문제를 공론화한 제빵기사 김소라(왼쪽)·정혜미씨.이들은 파리바게뜨 지회의 초대 수석 부지회장·사무장을 각각 맡았다. 서성일 기자

노사 합의에도 해피엔딩은 없었다



2017년 8월31일, 민주노총 화섬노조 파리바게뜨지회가 공식 출범했다. 노조와 이정미 의원실이 주축이 돼 불법파견 문제를 공론화하자 여론의 관심이 쏠렸다. 전국 각지에서 제빵기사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고용노동부는 파리바게뜨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했다. 2017년 9월 제빵기사 5378명을 직접 고용하라고 명령했다. SPC는 사태 초기 법적 대응을 거론하며 버텼으나, 정부가 추가 사법처리 및 530억원 규모의 과태료 부과 강행방침을 밝히면서 입장을 선회했다. 2018년 1월11일, 파리바게뜨는 자회사를 통해 제빵기사를 고용하기로 노조와 합의했다. 시정지시 113일 만이었다.

- 노사 합의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당시 찍힌 사진을 보면 굉장히 밝게 웃고 있어요. 다 끝난 줄 알았어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처음으로 성취를 느낀 순간이기도 했고요. 근데 끝난 게 아니었어요. 노사가 싸우다가 합의가 되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해피엔딩인 줄 알았거든요. 합의서를 쓰면 합의서를 이행하라고 또 싸워야 하더라고요.”

- 제빵기사들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네요.

“조금 복잡한 이야기인데, 자회사가 만들어진 뒤 한국노총 소속 노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소속인 저희, 상생기업 시절 기업노조 이렇게 노조 셋이 함께 있는 구조가 됐어요. 지금은 한국노총 노조와 기업노조가 연합노조가 됐어요. 관리자 중심 노조예요. 한국노총 노조가 과반 노조가 되면서, 저희는 교섭권을 갖지 못했어요. 회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선고가 12월에 있거든요. 그 결과에 따라 어떻게 싸워야 할지 또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 싸움을 시작한 걸 후회한 적은요.

“당연히 ‘현타(현실자각타임)’는 오죠. 그래도 계속 싸울 수밖에 없잖아요.”

- 힘들 땐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나요.

“소녀시대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더 보이즈’란 곡인데 ‘겁이 나서 시작조차 안 해 봤다면 그댄 투덜대지 마라’ ‘주저하면 기회는 모두 너를 비껴가, 가슴 펴고 나와 봐라’ 이런 가사가 공감됐어요. ‘다시 만난 세계’는 노조를 처음 시작할 때 많이 들었죠.”


- 노조활동을 하며 알게 된 기사들의 고충이 있다면요.

““여성 기사들은 성희롱·성추행 피해가 컸어요. 협력사 관리자가 점포 앞에 찾아와 드라이브하자며 조르기도 하고, 술자리를 강요하기도 해요. 임신한 기사들에 대한 처우도 안 좋았어요. 노조 만들기 전엔 노동법은 물론 모성보호란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임신하면 ‘저 사람 곧 퇴사하겠구나’ 그런 분위기였죠. 2018년 인권위 진정을 넣은 사건인데, 임신한 기사님이 근무 중 하혈을 했어요. 임산부가 하혈하면 병원에 보내는 게 우선이잖아요. 관리자가 대체 인력을 구할 때까지 대기하란 지시를 내린 거예요. 그렇게 3시간을 기다렸고, 결국 유산했어요. 큰 상처였을 텐데, 이 기사님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셨어요. 유산 휴가 안내를 못 받아서 본인 휴무를 당겨쓰기도 했더라고요. 휴무는 연차로 돌리고, 유산 휴가는 급여로 돌려받는 선에서 사건이 정리됐어요. 최근에도 모성보호 안내가 잘못돼 임신한 기사님이 불이익을 당한 사례가 있어요. 관리자에게 항의하던 중 큰소리를 내고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기사님만 징계위에 회부됐고요. 1인 시위에 나섰고, 외부로 사건이 알려지면서 회사가 사과했어요.”
(피비파트너즈는 지난 7월 제빵기사에게 인사위원회 개최를 통보했다. 이로부터 2개월 후인 9월 관리자(BMC)에게도 징계위 회부 통보를 했고, 9월24일 열린 징계위에서 제빵기사는 견책, BMC는 경고 징계 처분을 받았다.)

- 코로나19 이후 어려움은 없나요.

“확산 초기 마스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어요. 마스크는 점포 소모품이라 가맹점주가 본사에 물품을 주문할 때 같이 구매해서 지급했거든요. 2월부터 주문 자체가 막혔어요. 면 마스크라도 지급해달라고 했는데, 아무 조치가 없었어요.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위생 점수가 깎이고, 진급에 영향을 미쳐요. 4월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는데, 그제야 회사가 움직였어요. 거의 하루 만에 해결됐죠.”

- ‘어쩌다 영웅’ 수식어는 어떻게 보시나요.

“어쩌다는 맞지만, 영웅은 아니에요. 그냥 ‘어쩌다 이러고 있네요’ 정도?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여전히 쑥스러워요. 조합원에게 만나자고 하면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제가 그러죠. ‘부끄러운 건 피차 똑같으니 일단 만납시다’라고요.”

- 그럼 임종린이 생각하는 ‘어쩌다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요.

“지방은 점포 수도 많지 않고, 점포 간 거리도 멀어요. 제빵기사들은 점포 안에서 혼자, 섬처럼 일하죠. 제가 그런 입장이라면 노조 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저를 믿고, 신념을 믿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 애쓰는 기사님들을 보면 매번 놀라요. 탄압이 들어오기도 하고, 점포에서 내쫓기기도 하거든요. 지칠 법한데, 그럴 때마다 ‘지회장님, 연장 수당 요구하는 게 맞지 않나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하면서 할 말을 다 하세요. 정말 영웅이 있다면, 이분들이 영웅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이유진 기자 yjlee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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