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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대선에서 차별금지법이 쟁점이 된 것은 다행이다. 어쨌거나 유력 후보들은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후보, 입법은 필요하나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후보, 반대하는 후보가 있다.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지, 판단기준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전부는 아니다. 차별에 대해 어떤 현실 인식과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중요한 문제다.

윤석열 후보는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했다. 다음날에는 “구조적 남녀 차별이 없다고 한 게 아니”라며, 그보다는 “개인별 불평등과 차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쯤에서 구조적 차별이 무슨 말인지 좀 더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취업박람회를 찾은 구직자가 현장에서 면접을 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취업박람회를 찾은 구직자가 현장에서 면접을 보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구조적 차별’은 차별의 한 형태다. 유럽평의회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어떤 조직에서 그 조직의 절차, 관행, 문화 등으로 인하여 소수자 집단이 겪게 되는 불이익을 뜻한다. 예를 들어, 여성이 국회의원이나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다고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한 국가는 없을 테지만,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최고경영자가 많지 않은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체계, 구조, 문화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윤 후보는 아마도 구조적 성차별을 이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명시적이고 의도적인 차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을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구조적 성차별이 철폐된 나라’로 감히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전문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는 것을 타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구조적 차별보다는 ‘개인적 차별’에 집중해야 한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윤 후보에 빙의하여 그 취지를 짐작해본다면, 명시적인 차별은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경우는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런 차별을 해결해주는 것 정도는 국가의 임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각종 지표로 입증되는 여러 여성 차별이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 뿐이고, 차별을 낳는 관행이나 문화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선거서 ‘차별’은 까다로운 이슈
그래도 구조적 차별 문제 빼고는
우리 미래를 얘기할 수 없기에
집요하게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구조적 차별의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차별금지정책의 필요성도 부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자, 소수인종 등 소수자집단을 명시적이고 의도적으로 차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문제없어 보이는 공식적 법·제도의 틈새 사이에서 은밀하고 교묘히 소수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관행과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차별의 범위를 확대하고, 차별 판단 기준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효과적인 차별구제방법을 모색해왔다. 이것이 차별금지정책이고, 그 기본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구조적인 차별이 드러날수록 그 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법·제도적 조치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구조적 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면 정확히 그 반대다. 각자도생하며 개인적으로 해결하면 되니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재명 후보는 디지털 성범죄의 근절을 약속하면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중 30%가 남성이라는 점을 들어 “중요한 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인권”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돋보이고 공약 자체의 완성도도 높다고 생각되지만, 남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애써 강조한 대목은 찜찜하다. 성희롱이나 성범죄, 가정폭력 등 흔히 ‘여성 문제’로 여겨졌던 사안에서 남성 피해자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피해자의 성비가 역전되거나 성별 격차가 사라진 경우는 없다. 즉 성별 격차는 우연이 아니며,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구조적’이다. 이 구조를 깨야 하기 때문에 여성인권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여성주의적 관점을 젠더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남성 피해자도 ‘구조적 차별’의 산물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은 역설적으로 여성의 구조적 차별을 집요하게 분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는 것이 지상목표인 선거에서 차별은 까다로운 이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 적당히 침묵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집요하게 따져 물을 수밖에 없다. 차별 문제를 빼놓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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