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③ 바보야, 모든 게 ‘젠더’야

유한킴벌리, 재택·시차출퇴근제 등

수십년간 관련 제도 안착 공들여

노제원씨, 육아휴직 쓰지 않고도

주2회 재택으로 ‘주양육자’ 소화

일하며 돌볼 수 있는 ‘유연근무제’

기업 인식 변화·정부 지원 절실

“현우랑 승우, 이제 엄마한테 인사하자. 엄마 안녕~” “엄마 안녕~”

유한킴벌리 여성용품사업부문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와 아이들이 7일 자택에서 출근하는 안은희씨(41)와 인사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 여성용품사업부문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와 아이들이 7일 자택에서 출근하는 안은희씨(41)와 인사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지난 7일 오전 8시30분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노제원씨(41)의 집. 아빠 노씨가 32개월 된 쌍둥이 아들 현우, 승우의 손을 이끌고 현관으로 향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 서 있던 엄마 안은희씨(41)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아이들은 익숙한 듯 엄마를 배웅하더니 다시 아빠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집에 남은 노씨는 아침부터 활기차게 뛰는 아이들을 붙잡아 밥을 마저 먹이고, 깨끗이 씻기고, 옷을 입히고, 10분 거리 어린이집에 데려다줬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켠 오전 9시 10분 그의 업무는 시작된다. 노씨는 “일주일에 두 번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챙기고 돌본다”며 “업무 시간을 조절하며 일도 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남성이 ‘돌봄 영역’으로 들어오려면

경향신문 플랫팀은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초점집단면접(Focus Group Interview·FGI)을 통해 2030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내 일터와 생활 모두가 불평등하고 가부장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며 “지금 당장 내가 행복하지 않으니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먼 미래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제 여성들에게 생애 과업의 중심이 된 일터 환경과 결혼과 출생의 핵심인 가정의 문화를 성평등하게 바꾸는 것은 중요한 숙제가 됐다.

노씨의 사례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그를 주목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우리나라에서 드문 남성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그와 배우자가 동시에 일자리를 유지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노씨의 회사 조직문화 덕분이다. 노씨는 생활용품 기업 유한킴벌리에서 여성용품 온라인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1990년대부터 재택근무와 시차출퇴근제를 실행해왔다. 2008년부터 가족친화기업으로 지정될 만큼 여러 제도를 선도적으로 운용해왔다. 생산현장에서는 4조2교대 근무를, 영업직은 현장 출퇴근제를 시행 중이다. 사무직도 주1회 재택근무를 ‘디폴트’로 두고 격주에 한 번 연차 사용을 독려하는 ‘재충전 휴일’ 제도를 운용 중이다.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아빠 육아휴직이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정작 노씨는 쓴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재택근무를 통해 아이들의 주양육을 맡고 있다. 노씨는 인터넷 쇼핑몰에 등록된 자사 제품을 관리하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데, 화상 회의나 메신저, e메일로 소통하기 때문에 재택근무를 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다. 유한킴벌리도 현재 ‘주1회 재택근무 정책’을 운용 중이지만 그는 주양육자이기에 부서장과 주2회 재택근무를 협의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2일은 노씨가 아이들을 등하원시키고, 나머지 3일 아이들 하원은 노씨의 어머니 도움을 받고 있다.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노씨의 배우자 안은희씨는 사람을 대면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출퇴근 시간을 바꾸거나 재택근무하는 것이 어렵고, 갑자기 아이들이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반차를 쓰기도 쉽지 않다. 이런 구조에서 노씨가 양육을 전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아침에 안씨가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쌍둥이를 준비시켜 어린이집에 보내고, 오후에는 하원까지 시킨 후 놀아준다. 갑자기 아이가 열이 난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어린이집이 휴가 기간 문을 닫을 때도 아이들을 챙기는 건 노씨다. 그는 “회사가 언제든 재택근무나 시차출퇴근제를 사용해도 상관없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육아가 한층 수월하다”며 “이런 문화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고민이 컸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간병하기 위해서 지방에서 한 달간 지내면서 원격근무를 하겠다고 회사에 신청을 했어요. 별다른 절차 없이 받아들여주더라고요. 내가 필요할 때 회사 내 제도를 통해 가정을 돌볼 수 있고, 제도 사용 뒤에도 회사에서 압박을 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마치 한국 사회의 전형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노제원씨 사례는 회사의 적극적인 육아 친화적인 제도 운용과 분위기 조성이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돌보는 사회’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직장 분위기가 이렇다면 엄마냐 아빠냐가 아니라 누가 시간을 더 낼 수 있느냐, 누가 더 여유와 체력이 있느냐에 따라 가사 노동과 돌봄의 전담자도 달라질 수 있다.

유한킴벌리에서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과 어린이집 등원에 앞서 함께 책을 읽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에서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과 어린이집 등원에 앞서 함께 책을 읽고 있다. 조태형 기자

하지만 ‘아이는 엄마가 돌보는 것’이라는 관념이 확고한 이 사회에선 그렇지 않다. 노씨는 남성 친구들 중에서 교사를 제외하고 육아 관여도가 가장 높다. 다른 친구들은 휴직하지 않는 이상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 나아가 남성이 휴직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그의 상황에 온전히 공감해주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요즘은 아빠들도 육아를 많이 하니까 또래 아이를 키우는 남성 직장 동료, 친구들과 서로 얘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도 ‘온도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보통 아빠들의 육아 부담이 아메리카노 정도의 힘듦이라면 저는 에스프레소 정도로 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배우자인 안씨 역시 “보통 아이를 엄마가 키우고 아빠가 돕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주위에서 ‘남편이 무슨 일 하냐’고 많이 물어본다”고 말했다.

현재 많은 회사들이 제도는 갖추고 있다. 중요한 건 그 제도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회사의 추동력과 사내 직원들의 인식 변화다. 유한킴벌리도 2005년까지는 육아휴직 사용자가 없었고, 남성 육아휴직자가 처음 나온 것도 2009년이 되어서다. 회사는 지속적으로 육아휴직 사용에 대한 만족도 조사 등을 통해 제도를 보완했다. 유한킴벌리 ESG&커뮤니케이션본부 김영일 수석부장은 “‘처음’이 어렵다는 게 느껴졌다”며 “회사가 의지를 가지고 챙기다보니 제도가 안착됐고 문화로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한킴벌리 직원들이 ‘예비부모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 간담회는 본인 또는 배우자가 임신한 직원, 그리고 해당 직원의 부서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축하를 해주며 관련 제도를 설명하는 자리다. 유한킴벌리 제공

유한킴벌리 직원들이 ‘예비부모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이 간담회는 본인 또는 배우자가 임신한 직원, 그리고 해당 직원의 부서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축하를 해주며 관련 제도를 설명하는 자리다. 유한킴벌리 제공

이 회사가 얼마나 직원들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제도도 있다. 유한킴벌리는 아예 분기에 한 번씩 본인 또는 배우자가 임신한 직원, 그리고 해당 직원의 부서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 축하를 해주며 관련 제도를 설명하는 ‘예비부모 간담회’를 2009년부터 열고 있다. 이 자리에서 직원은 출산휴가·육아휴직이나 시차출퇴근제·재택근무 등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안내받고, 동시에 부서장은 제도 사용을 독려받는다. 회사는 이런 간담회를 통해 직원들에게 가정을 돌보는 게 긍정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제도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김 수석부장은 “우리도 처음부터 이런 제도를 쉽게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며 “처음 제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눈치 주거나 면박 주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제원씨 역시 아이가 태어나기 전 이 간담회에 참여했다. 그는 “육아휴직이나 시차출퇴근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저귀 바우처 등 회사의 지원 혜택은 무엇인지 상세히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누군가 육아휴직을 하거나, 재택근무와 원격 근무를 해도 전혀 눈치 보지 않아도되는 문화는 이런 시간이 쌓여 형성된다.

“일터 안에 ‘돌봄’이 들어오는”
유연근무제 확대 필요

육아휴직을 쓰지 않고도 주양육자가 될 수 있었던 노씨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전문가들은 유연근무제 본격화 논의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보통 수개월에서 1년을 사용하는 육아휴직제도는 대체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휴직을 길게 사용하면 ‘인력 공백’을 우려하는 기업도 좋아하지 않고 공백을 채우는 직원들도 환영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성의 고용을 불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며 “시간선택제, 재택근무 등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고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를 보편화하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노동자가 일터와 완전히 분리되는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는 것보다 유연근무제를 시행하게 되면, 일터 안에 ‘돌봄’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된다. 기업의 분위기가 빨리 바뀔 수 있고,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돌보는 체계로 가기 더 용이해지는 셈이다.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재택근무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재택근무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 같은 회사는 한국에 많지 않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지난해 기준 유연근무제를 사용하고 있는 임금노동자는 전체의 15.6%로 나타났다. 대다수 회사들은 문화 조성은커녕 제도조차 정착시키지 못한 상태다. 고용노동부의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시간선택제·시차출퇴근제·선택근무제·재량근무제·원격근무제·재택근무제 등 6개 유연근무제도 중 1개 이상 도입한 사업체는 전체의 25.1%에 불과했다. 그러나 유연근로제를 도입한 사업체의 98.8%는 도입 효과가 ‘긍정적’이라고 응답했다. 다만 추가 도입하겠다는 사업체는 2.1%에 그쳤다. 유연근무제 도입 비율도 2년 전과 비교해 크게 낮아졌다. 2020년엔 38.5%였으나 2022년 25.1%로 떨어졌다. 코로나19가 확산된 첫해 재택근무가 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일·생활 균형을 위한 정부 지원이 본격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를 본격화하는 분위기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쓰기 어려워하는 중소기업 직원들을 위해 ‘육아기 단축업무 분담지원금’을 신설했다. 10시간 이상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사용한 직원의 업무를 분담한 동료 직원에게 월 20만원 한도 내에서 사업주가 보상을 주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자의 ‘통상임금 100% 지원구간’을 확대하는 내용도 담겼다. 현재는 1주당 단축시간 중 최초 5시간에 대해서만 통상임금의 100%를 지급하고 이후부터는 80%를 지급하고 있다. 개정안은 최초 10시간으로 늘리도록 했다.

📌[플랫]미안해하지 않고 쓸 수 있도록…‘육아기 단축근무 분담 지원금’ 신설

기업의 노력도 중요하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연근무제는 노동자에게 주는 제도 같지만 멀리 보면 회사에도 유익한 제도”라며 “숙련 인력이 돌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되면 작은 기업일수록 숙련 인력을 쓸 수 있다는 이점이 크다”고 말했다.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와 배우자 안은희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유한킴벌리에서 근무 중인 노제원씨(41)와 배우자 안은희씨(41)가 7일 자택에서 아이들의 어린이집 등원을 준비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걸림돌은 ‘장시간 출석주의(presentism) 문화’에 익숙한 한국 회사들이다. 한국 기업에서 중요한 성과지표는 여전히 ‘절대적 시간 투입량’이다. 배우자의 가사노동 지원을 받으며 더 많은 시간을 투입 가능한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사이에 차이가 벌어지는 성별 불평등의 핵심 요인이기도 하다. 신 교수는 “장시간 출석주의 문화에 익숙한 중장년 남성들이 경영·관리자로서 기업의 규칙과 제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근무 시간과 장소의 유연성을 일탈적인 요소로 바라보기 쉽다”며 “이들의 반발과 저항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유연근무제 정착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유연근무제를 부담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로 보라고 말했다.

“유연근무제는 일과 가족, 돌봄과 개인 생활의 요구를 균형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시공간적 자율성의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를 위해서 한국 기업에 시급한 것은 ‘신뢰’ 문제이지요. 노동자는 책임감을 갖고 일하고 기업은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가 가능한 기술 기반을 마련해야 하며 이러한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운 기업은 정부가 지원해야 합니다.”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