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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③ 바보야, 모든 게 ‘젠더’야

현금성 정책도, 인구부도 ‘아니다’

일하는 여성·돌보는 남성이 늘어나는

‘젠더 전환’이 ‘답이다’

전문가들은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돌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저출생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는 남성이 ‘무급돌봄’을, 여성은 ‘유급노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하는 ‘젠더 전환’ 논의와 맞물려 있다. 남성은 그간 누군가 무급으로 감당해야 했던 돌봄에 더 참여하고, 여성은 가사·돌봄으로 중단해야 했던 자신의 일자리를 지켜가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 김현미 연세대 교수,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등 여성 노동·돌봄 전문가들에게 정책·의제 우선순위를 물어봤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횡단보도에서 시민들이 걷고 있다. 이준헌 기자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 횡단보도에서 시민들이 걷고 있다. 이준헌 기자

남성은 ‘무급돌봄’을, 여성은 ‘유급노동’을

전문가들은 단순하게 남성의 돌봄 역할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남성성 전환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경희 위원은 “남성의 육아휴직 참여 확대를 위한 제도가 발전되어 왔으나, 단순히 ‘이용률’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자녀양육이 부모 공동책임이며, 전통적 남성성 개념에 도전하는 인식에 대한 공감대 확산은 실패했다”고 말했다.

반면 스웨덴은 자녀 양육은 부모의 공동책임이라고 강조하는 ‘부성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단순히 육아휴직 비율을 높이는 게 아니라 사회의 전통적 남성성 개념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부성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프로젝트였다. 마 위원은 “정부가 직접 가족 내에서 남성의 가사, 양육, 아픈 가족 구성원 돌봄 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여나가는 것도 방법”이라며 “육아휴직을 비롯한 일·가정 양립 제도 뿐 아니라 모든 정부 정책 홍보물 등에서 의도적으로 돌보는 남성을 많이 노출시켜서 의식과 문화의 변화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의 부성 캠페인 포스터. 스웨덴 정부는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렌나르트 달그렌이 아이를 돌보는 포스터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였다. 육아를 참여하는 것이 남성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좋은 남성이라고 홍보했다.

스웨덴의 부성 캠페인 포스터. 스웨덴 정부는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렌나르트 달그렌이 아이를 돌보는 포스터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였다. 육아를 참여하는 것이 남성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가 좋은 남성이라고 홍보했다.

📌[플랫]젠더 경계선이 없는 스웨덴, 누구나 경제적 자립을 기대하는 사회

신경아 교수는 ‘성평등돌봄공시제’를 제안했다. 남성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고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성별 육아휴직, 육아기단축근로제 등 사용 비율을 공개하는 것이다. 정부는 ‘성별근로공시제’를 공공기관부터 시범 도입했지만 공시 정보는 채용 비율, 근로자 수, 근속연수, 임금 비율에 머무는 상황이다. 애초 정부는 채용 단계에서는 서류 합격자부터 최종 합격자까지 성비, 근로 단계에서는 부서별 인원·승진자·육아휴직 사용자 성비, 퇴직 단계에서는 해고자·조기 퇴직자·정년 은퇴자 성비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정부의 성별근로공시제에 육아휴직 사용 성별 비율 등 ‘돌봄’ 관련한 내용을 공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기업을 움직이는 중요한 열쇠는 기업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데이터 공개”라며 “다양한 제도를 남녀 모두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플랫]성별임금격차 줄이기 위한 성별근로공시제…“저절로 좋아지는 건 없다”

성별임금격차 해소가 저출생 해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윤정 조사관은 “근본적으로 노동시장 성차별 기울기를 조정하겠다는 신호가 있어야 여성들이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며 “채용·승진 과정에서 명시적·묵시적으로 나타나는 차별적 관행을 개선하고, 일터에서 겪는 불이익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미 교수는 “해외 기업들은 성별, 인종 등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을 펴고 있지만 한국 기업만 그런 노력들을 하지 않다”며 “국가가 여성 혐오를 내버려두면 기업이 여성을 해고하는데 아무 문제를 안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이런 접근이 단시간에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마 위원은 “여성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임신·출산·양육 책임과 이에 따른 페널티(벌칙)를 ‘0’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생존을 위한 여성들의 ‘합리적’ 선택의 산물로서 저출생 현상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라고 말했다. 배진경 대표도 “남성생계부양자-여성돌봄전담자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돌봄자-노동자-시민 모델’로 가야한다”며 “독립생활자로서 모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모델로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A공공기관이 운용 중인 임신 출산 양육 관련 제도를 정리했다.

A공공기관이 운용 중인 임신 출산 양육 관련 제도를 정리했다.

기업 규모, 고용 형태, 종사하는 직무나 업종에 관계없이 출산휴가, 육아휴직, 육아기단축근로 등 정책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권수현 대표는 “육아휴직제도의 혜택이 공무원과 공공기관, 대기업 등에 근무하는 이른바 ‘상층부’ 여성들에게만 돌아가고 있다”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여성과 남성이 육아휴직 제도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전윤정 조사관도 “현재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는 물론, 자영업자, 학생까지 포괄하여 제도 사용이 가능하도록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금 지원(민주당)도, 인구부(국힘)도 ‘아니다’
일하는 여성·돌보는 남성이 늘어나는
‘젠더 전환’이 ‘답이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1호 공약으로 ‘일·가족 모두 행복’을 내놨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부총리급 ‘인구부’를 신설해 인구 정책의 컨트롤타워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일·가정 양립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아빠휴가(배우자 출산휴가) 1개월(유급) 의무화, 엄마·아빠휴가 및 육아휴직 신청 즉시 자동개시, 현재 150만원인 육아휴직 급여 상한 210만원으로의 인상 등을 제시했다.

지난 7일 정부 서울 청사 여성가족부 청사의 모습. 이준헌 기자

지난 7일 정부 서울 청사 여성가족부 청사의 모습. 이준헌 기자

민주당은 현금 지원책을 내놨다. 신혼부부에게 10년 만기로 1억원을 대출하고 첫 자녀 출산 시 무이자, 둘째 출산 시 원금 50% 감면, 셋째 출산 시 원금 전액 감면 혜택을 주는 정책이다. 신 교수는 민주당 정책에 대해 “출산 이후 지원받을 수 있는 현금성 정책은 결혼조차 망설이고 있는 청년 여성들에게 가 닿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저출생의 원인이 ‘불평등한 관계’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결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민의힘의 방향은 ‘인구학적 프레임’에 갇혀 있어 문제다. 이 프레임은 재정당국을 설득할 도구로서는 유용하다. 그러나 청년 여성들이 ‘가임기 여성’이나 ‘출산력’이라는 호명에 항의를 보여온 것을 이해한다면 정책 당사자들에게는 ‘인구부’라는 명칭부터 이해받기 어렵다. 게다가 성평등을 다루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한 후에 만들어지는 부처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인구’라는 숫자를 내세우면서 성평등을 지우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여성에게 불평등한 짐을 지우는 사회 시스템과 가족 관계를 바꾸겠다는 정부의 의지 없이 어떻게 여성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젠더 전환’이 근본 해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기존의 불평등한 젠더 규범에서 벗어나는 일은 남성 역시 외벌이 생계부양자라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라며 “일과 돌봄을 함께 하는 젠더 관계의 전환은 가족, 일터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함께 진행될 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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