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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이건 ‘젠더 갈등’이 아니라 ‘젠더 폭력’이다.”

지난 2일 오후 3시 서울 동작구에 있는 중앙대학교에서 총학생회 산하 성평등위원회(성평위) 폐지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성평위는 2014년 중앙대학교 총여학생회가 폐지된 뒤 총학생회 산하에 설치된 대안기구다. 집회를 주최한 ‘대학 내 백래시 규탄 공동행동’은 이번 성평위 폐지 결정이 대학사회에 만연한 반페미니즘 현상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공동행동 참가자들은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장미꽃을 들고 “성평위 폐지는 학생사회의 재난”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에브리타임’ 익명글서 시작된 폐지론
재학생 2만명 중 59명 찬성으로 통과
‘독립기구’ 아닌 성평위 발언권은 제한



대학 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구들이 사라지고 있다. 중앙대 성평위 폐지는 지난 9월30일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위원회 폐지 연서명 게시글에서 시작됐다. 이어 10월8일 총학생회 확대운영위원회에 성평위 폐지 안건이 올라왔고, 출석 인원 101명 중 59명의 찬성으로 성평위 폐지가 결정됐다. 회의에서 반성폭력위원회,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등 대안기구 설치가 제안됐지만 모두 부결됐다.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에서 2일 성평등위원회 폐지에 반대하는 규탄 공동행동에 참가한 재학생 등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총여학생회 대안기구가 폐지되는 건 중앙대가 처음이다. 한수빈 기자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에서 2일 성평등위원회 폐지에 반대하는 규탄 공동행동에 참가한 재학생 등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며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총여학생회 대안기구가 폐지되는 건 중앙대가 처음이다. 한수빈 기자

성평위는 독립기구가 아니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내린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은 성평위 폐지 연서명 진행자인 재학생 A씨의 제안을 낭독했다. 제안에는 “페미니즘 단체 폐지는 범사회적 흐름이다”, “성폭력 문제는 성평위가 아니라 학내 인권센터와 검경 등 행정·사법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A씨는 “연서명을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욕설과 협박을 받았다”는 이유로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았다.

중앙대 마지막 총여학생회 회장을 맡았던 백시진씨는 공동행동에 보낸 연대성명에서 “에브리타임이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받은 연서명이 마치 대표성이 있는 것처럼 여론을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김민지 중앙대 인문대학 인권위원장은 연대성명에서 “왜 중앙대학교 재적생 2만명 중 59명의 의견으로 성평위가 폐지됐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송지현 성평위 위원장은 A씨의 발언에 대해 “젠더 폭력의 주체가 오히려 피해자의 언어를 빼앗았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총학생회는 지난달 29일 페이스북에 “본교 성평등위원회 폐지를 ‘페미니즘의 백래시’로 규정하지 말라”는 입장문을 게시했다. 총학생회 측은 “성평등위원회 측과 꾸준히 소통을 해왔고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면서 “총학에서는 성평위가 진행하고 있던 사업과 정책들을 이어받아 진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총학생회는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 제휴 사업, 정혈(생리)용품 지급 사업, 성폭력 신고 창구 운영 사업 등 성평위가 담당했던 3개 업무를 총학생회로 이관해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성평등위는 총학생회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송지현 위원장은 “총학생회가 성폭력 피해 신고 창구 임시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한다고 하는데, 성평위로부터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 진지하게 상담 업무를 지속할 의지가 있는 게 아니라 당장 성평위 업무 공백을 무마하려는 것 같다”면서 “공식적으로 성평위는 폐지됐지만 제도권 밖에서 투쟁을 계속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 에브리타임 ‘혐오’가 업로드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타고 ‘전멸’한 총여
‘미투’ 전후 교수·학생 성폭력 고발은 늘어
‘총여’가 필요없다는 목소리는 누구 것인가



2010년대 들어 대학 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구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서울 소재 49개 대학 중 25개 대학에 총여가 있었는데, 이 중 21개 대학(4일 기준)에서 총여가 폐지됐다. 2013~2014년 건국대, 서울시립대, 중앙대, 홍익대에서 총여가 사라졌다. 2016년에는 숭실대가, 2018년에는 성균관대와 동국대, 광운대가 총여를 없앴다. 2019년에는 연세대가 총투표를 통해 총여를 폐지했다. 현재 총여 간판이 남은 대학은 경희대, 한양대, 총신대, 감리신학대, 한신대 등 5곳이다. 이 대학들도 총여학생회장 입후보자가 없어 수년째 집행부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유명무실한 상태라는 얘기다. 서울 소재 대학의 총여가 전멸한 것이다.

15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대학생들이 ‘성폭력 가해 교수 파면 촉구, 대학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연세대, 서울대, 동덕여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은 ‘해당 교수들이 학생들을 고소하고 학교측은 학생 보호는 커녕 나몰라라 하고있다.’고 말하며 용기있는 사람들로 인해 시작된 미투운동이 변질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15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대학생들이 ‘성폭력 가해 교수 파면 촉구, 대학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있다. 연세대, 서울대, 동덕여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은 ‘해당 교수들이 학생들을 고소하고 학교측은 학생 보호는 커녕 나몰라라 하고있다.’고 말하며 용기있는 사람들로 인해 시작된 미투운동이 변질돼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일각에서는 총여가 막 설치되던 1980년대와 달리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학내 성차별이 사라졌기 때문에 총여가 존재이유를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대학 등에 설치된 고충상담창구를 통해 접수된 성희롱·성폭력 사건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신고인 대부분은 여성 학부생이다. 교수들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대학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는 2018년에서야 시작됐다. 학생간 성폭력은 ‘단체카톡방’ 등에서 발생하는 성적 인권침해나 에브리타임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한 여성혐오, 불법촬영 등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들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고 안전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직은 (총여를 폐지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강해져 총여회장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2017년 한양대 총여 후보로 나섰던 김모씨와 선거운동본부는 “자살을 추천한다” “총여학X들 죄다 성노리개로 써야 한다” 등 악성 댓글과 메시지에 시달렸다. 2010년 연세대에서 총여 활동을 했던 이경은씨는 “총학생회나 단과대 학생회가 궐위라고 해서 없애자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며 “여학생 대표이기 때문에 반발이 많이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에서는 총여의 대안으로 총학생회 내 여성위원회나 인권위원회 등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총여의 대체기구가 총학생회 산하 기구가 될 경우 학내 성폭력 방지·해결, 여학생 권리 보장을 위한 독립적 활동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동국대에서 여학생총회 성사를 위한 모임을 이끌었던 문모씨는 “(대안 기구가) 이전과 달리 집행기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문기구로서만 존재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중앙대 총여학생회에 이어 대안 기구인 총학생회 내 성평등위원회까지 폐지된 것처럼, 대학 내 여성 목소리를 대변하는 기구에 대한 공격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경희대 ‘총여학생회’ 폐지 수순···‘캠퍼스 페미니즘’의 미래는



이두리 기자 redo@khan.kr
오경민 기자 5km@khan.kr
강한들 기자 handl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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