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58)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다. 그는 ‘디올 70년 역사의 첫 여성 디렉터’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이며, 2017년 데뷔 무대에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메시지를 던진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한국의 언론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디올’ 패션쇼에 등장한 이화여대 ‘과잠’…금발女는 왜 이대 과잠을 입었나
디올 패션쇼 등장한 ‘이대 과잠’…금발의 그녀 정체는?
디올 패션쇼에 시선강탈 ‘이대 과잠’…금발 여성의 놀랄 정체

누리꾼들은 반발했다. ‘한국 언론의 클래스’를 비웃는 이나 ‘디올 수석 디자이너가 이대 과잠을 입은 이유가 더 낫다’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리 유능해도 ○○녀로 치부되는 사회’를 향한 날선 불만도 제기됐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과 없이 쓰였던 ‘○○녀’는 이젠 분명 눈총을 받는 표현이 됐다.

시민들은 언론의 헤드라인을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녀’에 분노하고 기자에게 되묻는다.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지지가 언론에 미친 영향을 확인하려 했다. 10년 전 헤드라인과 지금 헤드라인에서 달라진 여성의 모습들을, 데이터로 확인해본다는 취지다.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다이브는 한국언론재단 뉴스아카이브 빅카인즈에 수집된 2011~2021년 전국 일간지 10개 매체(경향신문·국민일보·내일신문·동아일보·문화일보·서울신문·세계일보·중앙일보·한겨레·한국일보)의 온라인 기사 763만8139건을 전수 분석했다(조선일보는 2018년 이전 빅카인즈 자료가 없어 분석 대상에서 제외함). 이를 머신러닝을 활용해 ‘여성 헤드라인’(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들어간 제목)과 ‘비여성 헤드라인’(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이 없는 제목)으로 구분했다. 여성 헤드라인은 전체의 6%(45만7974건), 비여성 헤드라인은 94%(717만5769건)였다.

데이터 분석 방법은 여기(https://bit.ly/3NJAjQ1)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년치 여성 헤드라인 45만여건을 형태소 분석기 Mecab-ko로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엄마(2만4155회), 아내(2만2425회), 소녀(1만9973회), 위안부(1만4081회), 공개(1만4054회) 등의 순이었다. 살해, 성폭행, 징역 등 범죄·폭력에 해당하는 단어와 여친, 신부, 언니 등 고정적 성역할에 해당하는 표현들도 많았다. 10년치 여성 헤드라인 뭉치에서 나타난 여성의 모습은 주로 전쟁범죄나 강력범죄의 피해자, 논란과 의혹의 연루자, 결혼 후 가부장제의 성역할에 충실한 아내이거나 어머니, 또는 미모의 여신이었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듯한 여성 헤드라인에서도 바뀌는 것들이 있었다. 헤드라인은 기자의 판단, 독자의 수용성, 언론사의 이해, 당대의 유행이나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10년치 여성 헤드라인 뭉치 안에서 오르고 내리는 단어들의 움직임을 좇아봤더니, 그 안에서는 뚜렷한 경향성이 발견됐다.

여성비하, 신체묘사, 차별적 표현은 줄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적·비하적 표현은 감소세가 분명했다. ‘노처녀’는 더 이상 전국 일간지 헤드라인에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 됐다. 사전적 의미는 ‘결혼을 하지 않은 나이 든 여성’이지만, 노처녀는 노총각과 함께 특정 성별인 동시에 특정 집단(미혼·비혼)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로 쓰였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결혼 적령기’라는 개념도 사실상 사라졌다. 노처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표현’이라는 인식과 함께, 누군가를 노처녀라 지칭하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암묵적 합의도 생겼다. 2011년 16회, 2015년 13회, 2018년 2회로 줄어온 여성 헤드라인 속 ‘노처녀’는 지난해 0회로 아예 10개 전국 일간지 헤드라인에서 사라졌다. 지난 10년 동안 여성 헤드라인에서 ‘노처녀’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쓴 곳은 세계일보(28회)였고 경향신문(13회), 중앙일보·한국일보(각 9회), 서울신문(8회) 등의 순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한 ‘노처녀’ 기사는 2020년 4월 세계일보에 실린 것이었다.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2013~2015년은 여성 헤드라인의 ‘흑역사’였다. 특히 2014~2015년에 미모·여신·몸매·충격·화제가 가장 많이 언급됐고, 빈도 순위도 높았다. 순위가 높다는 것은 다른 단어들에 비해 더 자주 언급됐다는 뜻이다. 여친·충격·얼짱·가슴·비키니·노출·경악·청순·자태·볼륨·허벅지 등이 2013~2015년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살해·성폭행 등 범죄 관련 키워드는 꾸준히 상위권을 기록했지만 2014~2015년에는 미모·여신·미녀·충격이 살해·성폭행보다 더 많이 등장했다.

미모·여신·미녀·충격이 뒤덮었던 여성 헤드라인은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발생한 2016년 이후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2015년 여성 헤드라인에서 1094회 등장한 ‘몸매’는 2021년 22회로 줄었다. 같은 기간 가슴골(98회→7회), 하의(39회→1회), 복근(99회→1회), 얼짱(213회→14회), 누드(90회→6회), 글래머(88회→3회) 등 여성의 신체 부위를 일컫거나 외모를 평가하는 표현들도 여성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빈도가 확연히 감소했다. 조강지처(13회→1회), 골드미스(13회→1회), 비너스(86회→1회), 마녀(872회→134회), 꽃뱀(71회→19회), 마누라(50회→5회)처럼 불필요하게 성별을 강조하거나 고정적인 성역할을 부각하는 표현 또는 특정 성별을 비하하는 단어도 점차 인기가 떨어졌다.

‘페미니즘’과 ‘성범죄’가 함께 늘었다

지난 10년간 여성 헤드라인에서 큰 폭으로 늘어난 키워드들은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는 단어들이었다. 2011년 여성 헤드라인에 처음 등장한 ‘혐오’(직장녀가 혐오하는 성차별 발언·업무는?·경향신문 2011년 4월6일)는 2021년에 140회로 늘어났다. 이전까지 혐오로 분류되지 않았던 행위들이 특정 집단 또는 성별에게 차별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혐오로 규정되는 말과 행동의 범위가 늘어난 결과로 보인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충격적 여성혐오 범죄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이어 ‘여경 무용론’, ‘서울역 묻지마 폭행’, 후보 검증을 빙자한 ‘쥴리 벽화’ 논란,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를 향한 ‘숏컷’ 공격, 여성을 젖소에 빗댄 서울우유 광고 등이 꾸준히 여성 헤드라인에 반영된 결과다.

여성 헤드라인은 점차 페미니즘과 가까워지는 경향을 띠었다. 2011년 1회(여성계 18대 국회 ‘젠더 마이크’로 12명 선정·경향신문 2011년 12월4일)였던 여성 헤드라인 속 ‘젠더’는 2021년 64회로 늘었다. 젠더는 여성 헤드라인 빈도 순위(869위)에서도 지난해 처음으로 1000위 안으로 진입했다. 여성 헤드라인 속 ‘페미니즘’은 2011년 3회에서 지난해 40회로, 페미니스트는 4회에서 27회로 언급이 늘었다. 이들 단어는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발생한 2016년 전후의 빈도 차가 확연했다. 2018년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미투 운동’, 뒤이은 ‘스쿨 미투’도 여성 헤드라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젠더’가 더 자주 등장한다고 해서, 보다 성평등한 헤드라인이 많아졌다고 단정짓긴 어렵다. 원래는 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반동이란 뜻이지만 ‘페미니즘을 향한 반발’의 의미로 사용되는 ‘백래시’는 2018년 이후 그 빈도수(2018년 4회→2021년 8회)가 조금씩 늘고 있다. ‘젠더’는 ‘갈등’과 붙은 단어가 됐다. ‘젠더 갈등’이 ‘성차별’을 대체하면서 구조적 불평등 문제는 가려지고 남녀 간 대립구도만 부각됐다.

페미니즘보다 더 빠르고 가깝게 여성 헤드라인에 달라붙은 표현은 단연 ‘범죄·폭력’이다. 2021년 여성 헤드라인에는 아내, 엄마 다음으로 ‘살해’가 많이 등장했다. 2014년 44위였던 살해는 꾸준히 늘어 지난해 처음 10위권에 진입했다. 징역, 경찰, 폭행, 구속, 성폭행, 사망 등도 여성 헤드라인에서 언급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범죄·폭력 키워드 증가가 곧 여성 대상 범죄 증가를 의미하진 않는다. 강력범죄 중 살인(미수 포함)만 놓고 본다면 여성 피해자 숫자는 줄고 있다. 여성 헤드라인의 ‘살해’는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과 관련이 있다. 김태현 살인사건은 ‘노원구 세 모녀 살해사건’으로, 이석준 살인사건은 ‘송파 신변보호 전 여친 가족 살해사건’으로 불렸다. 이처럼 ①여성이 사건의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으로 등장하는 범죄이면서 ②충격적인 강력범죄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 많은 기사가 쏟아졌다. 지난해 신상정보가 공개된 피의자 10명 중 절반이 스토킹 또는 교제했던 여성을 살해한 경우였다.

줄어든 ‘○○녀’와 여전한 ‘○○맘’

여성 헤드라인에 등장하는 빈도와, 여성 피해자 수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범죄는 ‘성범죄’였다. 성폭행·성추행·촬영·화장실 등의 단어가 빈도 순위나 빈도수 측면에서 모두 증가했는데 강간·유사강간 여성 피해자는 2015년 5551명에서 2020년 5987명으로 늘었다. 카메라 등을 이용한 불법촬영은 발생 건수나 피해자 수가 최근 들어 줄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피해자의 비중(2020년 84.8%)이 높은 범죄다. 여성 헤드라인에서 범죄·폭력 표현이 늘어나는 현상은 여론의 관심이 쏠리는 충격적 범죄의 영향, 여성 대상 범죄를 향해 높아진 여론의 관심, 여성 대상 범죄의 증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10개 전국 일간지의 헤드라인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모두 담지는 못한다. 특정 표현이 감소하는 원인은 ‘차별적 표현이라는 공감대’ 때문일 수도, ‘생명력을 다한 유행어의 자연도태’일 수도 있다.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일상의 혐오 표현이나 비하적 지칭은 여전한 사회 문제로 거론된다. 기성 언론이 아닌 인터넷 매체로 범위를 확장할 경우 성차별적 표현이나 혐오 표현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드라인 속 여성의 모습은 변하고 있다. 대다수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틀린 말은 아니잖아’라고 가볍게 넘겼던 표현들이 누군가에게 차별이고 혐오일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어떤 단어와 표현들은 언론 제목에서 사라졌다. 여성을 약하거나 감정적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도 점차 줄었다. 치우리에게 ‘금발녀’를 붙인 언론이 지탄을 받았던 것처럼, 여성 신체의 특정 부위나 외모를 강조하면서 성적 대상으로만 다루는 경우도 이제는 당연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줄어든 ‘○○녀’와 여전한 ‘○○맘’, 늘어난 ‘페미니즘’만큼 증가한 ‘백래시’, 사라지지 않는 ‘몹쓸 짓’과 빈번해지는 ‘살해’는 아직 우리 사회 성평등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만큼 변해왔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이어지는 <노처녀가 사라졌다> 인터랙티브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배너를 눌러주세요. 배너가 작동하지 않으면 이 링크(http://www.khan.co.kr/kh_storytelling/2022/gone-xxxgirl/)를 입력해주세요.


[다이브X플랫][헤드라인 속의 ‘OO녀’]뉴스에도 세상에도 노처녀는 없다


[헤드라인 속의 ‘OO녀’] 취재팀

다이브(Dive) 조형국 ·이수민 기자, 플랫(flat) 이아름 기자, 디지털뉴스편집팀 신지혜 기자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