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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어머니는 미국에서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헌신한 싱글맘이었다. 용의자가 ‘성중독’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미국 애틀랜타 총격사건 희생자 현정 그랜트(한국명 김현정)의 아들 랜디 박이 어머니를 잃은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지난 18일(현지시간) 현지 매체 데일리비스트 인터뷰에서 박씨는 “한국에서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는 미국으로 온 뒤 우리를 키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면서 “나에게 어머니는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이 용의자 로버트 에런 롱(21)의 범행 동기를 ‘성중독’에 두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박씨는 “말도 안 된다”고 분노하면서 용의자 가족들을 향해서도 “그에게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에 남동생과 단둘이 남겨진 박씨는 거처를 옮겨야 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 온라인 기부사이트 ‘고펀드미’에서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계 4명을 포함해 8명이 사망한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에 대해 경찰이 “용의자는 성중독증이고, 혐오범죄인지 판단하기 이르다”고 발표하면서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성중독’에 무게 중심을 둔 듯한 잘못된 초동수사가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인종차별과 여성혐오가 뒤얽힌 이중 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돼 온 아시아계 여성의 현실을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망자 8명 중 한국계 4명을 포함한 6명이 아시아계였으며, 7명이 여성이었다.

19일(현지시간) 총격사건이 발생한 현장 인근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인종차별과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애틀랜타 | 로이터 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총격사건이 발생한 현장 인근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인종차별과 여성폭력에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애틀랜타 | 로이터 연합뉴스

사건의 용의자는 지난 17일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성중독자”이며 “유혹을 제거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범행 후 “성산업을 응징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가려 했다”고 말했다.

범행 장소인 마사지숍을 관할하는 체로키 카운티 보안관실은 롱의 주장을 두둔하며 “혐오범죄인지 판단하기 이르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용의자가 성중독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아직까지 인종적 동기에서 유발됐다는 초기 징후는 없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미국 주요 언론과 전문가들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아시아계 여성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니란 것이다. 시카고트리뷴은 칼럼을 통해 경찰의 초동수사를 비판하며 “‘성중독’은 인종차별과 여성혐오가 얼마나 깊게 얽혀있는지에 대한 논의 자체를 날려버리게 만드는 쓸데없는 표현”이라며 “경찰은 용의자의 미친 짓을 성중독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혐오범죄로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고 썼다. 경찰은 비판이 커지자 뒤늦게 용의자에 대해 혐오범죄 기소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은 “백인 남성 롱은 수사관들에게 성중독이 총격사건으로 이끌었다고 말했지만, 연방의원과 반인종차별 단체들은 이번 살인사건의 동기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반아시아 정서에 따른 것으로 추측해왔다”고 전했다.

📌제임스 우 “한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커뮤니티 전체 큰 충격..공동 대응 나설 것”

롱이 ‘성산업’을 응징하겠다면서 아시안 스파를 표적으로 삼은 것 역시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적 시선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 아메리카 페미니스트 그룹 대표이자 사회학자인 레이철 쿠오는 “미군은 필리핀전과 베트남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성매매를 장려하는 사업을 지원한 적이 있다”며 “이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성애화를 부추기고 아시아 여성들을 성적 일탈 대상으로 보는 고정관념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CNN에 밝혔다.

총격사건이 발생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숍 앞에 “우리는 서로 지키고 연대할 것”이라는 글과 함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그려진 그림이 놓여 있다. 애틀랜타 | 로이터 연합뉴스

총격사건이 발생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숍 앞에 “우리는 서로 지키고 연대할 것”이라는 글과 함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그려진 그림이 놓여 있다. 애틀랜타 | 로이터 연합뉴스

아시아인에 대한 이중적 시선 탓에 흑인 차별 문제와 달리 아시안에 대한 차별 문제가 그동안 쟁점화되지 못하고 쉽게 묻혔다는 분석도 나왔다. 미국의 인기 TV드라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나 <그레이 아나토미>에 투영된 아시아인들은 성공한 고학력 중산층이다. 대만계인 미셸 리는 여성전문매체 ‘릴리’에 “내 실제 삶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과 매우 다르고, 다른 아시안 여성들도 삶의 격차가 크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여성법률지원단체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잃었는데, 지난해 12월 기준 장기간 실업률이 가장 높은 집단은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아시아계 여성들은 소수의 성공사례를 통해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집단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고, 한편으로는 저임금의 일용노동자로 쉽게 소비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편견과 차별의 이중고통을 겪어온 아시아계 여성들은 국가와 사회에 자신들이 언제라도 혐오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고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에도 지쳤다”고 전했다.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흑인단체들도 연대 나섰다

미 정치권에서도 이번 사건을 혐오범죄가 아닌 일반 형사범죄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 혐오범죄는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 성 등 피해자의 고유 특질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범죄로 정의되고 있다. 혐오범죄 혐의가 적용되면 일반 범죄보다 더 엄격한 수사와 기소가 이뤄져 무겁게 처벌된다.

민주당의 매릴린 스트리클런드 하원의원은 이날 의회에서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범죄는 명백하게 밝혀져야 하고, 혐오범죄를 성범죄나 경제적 불안 등 다른 이름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흑인인 미군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스트리클런드 의원은 “흑인이자 한국인으로서 사건의 본질이 무시당하고 지워지는 게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래피얼 워녹 상원의원도 트위터에 “다시 한번 혐오란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며 “이 무의미한 죽음을 야기한 혐오를 없애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썼다.


장은교 기자 indi@khan.kr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hermes@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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